[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 김만호]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진 시노트 신부

나와 교회와의 첫 만남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를 품고 있는 석화산 기슭에 있던 성당, 아니 당시 그 성당 주임사제였던 진 시노트 신부님,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 신부님께서 주셨던 사탕을 통해서였다.

당시 서해에 있는 섬 중에는 흔치 않게 주임신부님이 상주하는 본당이 우리 동네에 있었는데, 하루에 몇 차례 지나는 버스 외에는 차가 다니지 않아 한적한 큰길가에 있던 집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으면 지나가시던 진 신부님께서 다가와 사탕을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그때 나는 아직 성당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진 신부님은 그저 신기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서양 아저씨였다.

진 신부님은 당신이 죽은 뒤에도 석화산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영종도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신부님을 존경하며 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 후 영종본당은 공소가 되어 1984년에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한상봉 기자

내가 본격적으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구호물자 영향도 있었겠지만 진 신부님의 관심과 사랑 덕에 많은 동네 사람들이 성당에 다녔고 대부분의 아이들도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다녔다.

학교 운동장 다음으로 넓은 성당 마당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주말이면 나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성당 마당에서 놀았다. 교리 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교리실에 들어가면 신자가 아닌 나는 혼자 창문을 통해 아이들이 수녀님과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엿보며 부러워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동네에서 성당에 다니지 않은 소수 중에 하나였기에 나는 꾸준히 다닐 수 없었고, 나갔다 안 나갔다를 반복했다.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다.)

성당은 우리 동네의 중심이었고 일부였다. 신자들은 동네 경조사에 적극 참여했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궂은일에 적극적인 자세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직접적으로 입교를 권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또 섬에서는 유일한 병원이 성당에 있었고, 손목시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절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당의 삼종 소리가 시계 역할을 했다. 성당 종소리는 화재와 같은 긴급한 상황과 세상을 떠나는 이의 임종을 알렸다. 성탄 때는 신자가 아닐지라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어린아이들이 준비한 성극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때에 성당 마당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파티마의 기적>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 아닌 신자였던 나에게 교회는 진 신부님처럼, 종교라는 형식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 신비를 간직한 끌림의 장소로 나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성당에서 만나는 선배들은 내 삶의 모델링의 대상이 되었다.

상처 입은 이들의 치유자, 교회

신병 훈련소에서 만난 개신교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종교활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내가 살던 섬의 야간 해안경계 단기병으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야간 근무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 개신교 단체에서 받았던 신약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가 원하는 행정병 자리로 옮겨 주시면 세례도 받고 평생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로서는 절실했던 것 같다. 얼마 후 정말 행정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근무가 없는 날 야간에 본당에서 수녀님과 단둘이 예비자 교리교육을 받고 드디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 잊혔던 진 신부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진 신부님께서 다시 한국에 오셨고 영종본당에서 회갑잔치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계기로 진 신부님께서 본당을 갑자기 떠나게 된 것이 인혁당 사건과 관련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강제추방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진 신부님께서 영종 본당 신자들뿐만 아니라 소외받고 상처 입은 많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노력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어떻게 현실에 기여하고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잠시 집을 떠나 객지에서 취업 준비를 하다 세상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상심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본당 신자들은 따뜻하고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활동을 하며 공동체의 관심과 지지에 힘을 얻어 교리신학원에 진학해 평신도 선교사의 꿈을 키웠지만 졸업 후 접하게 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또 한 번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 서울대교구 어느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유급 교사와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의 본당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일이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평신도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신부님과 본당 식구들, 특히 함께 활동한 동료 선교사, 교사, 그리고 밝고 순수한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는 회복되었다. 덕분에 교회 출판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교회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정서적 문제와 그로 인한 갈등으로 상처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늦은 나이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예술심리치료 공부를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본당 공동체는 나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고 그 공동체 안에서 나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다. 한계와 상처를 지닌 우리들이지만 교회(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치유와 회복을 선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가족을 본당에서 만나다

십여 년 전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과 가까이 살던 동네를 떠나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경기도 양주라는 낯선 땅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유동성이 높은 주위 환경에 적응이 안 돼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힘든 탓에 가족끼리 주일미사만 참석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본당 공동체 구성원들의 배려로 새로운 본당 공동체에 적응하게 되었고 멀리 떨어져 사는 친가족 못지않은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었다. 특히 늦둥이 셋째 희망이는 본당 공동체의 관심과 환영 속에 태어나 본당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가족 형태의 변화에 따른 부작용과 가족 해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걱정하지만, 전통적인 혈연 가족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은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본당 공동체가 바로 그런 새로운 가족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연결(connection)’이 아닐까 싶다.

예술심리치료를 공부하면서 전례와 상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 전례와 상징, 그리고 교회의 영적 유산들(개인적으로는 사막 교부들의 영성과 수행 전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을 통해 나의 심연과 연결되고, 다른 이들, 그리고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 좀 더 온전한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심리치료 공부는 이러한 신앙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나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연결하게 하는, 분열된 것을 통합되게 하는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

김만호 (에밀리오, 의정부교구 덕정성당,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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