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선교 일기]

‘선교’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사용하지만, 그 말이 너무나 광범위한 활동과 작업들을 포함하기에 우리가 사는 방식과 하는 일들을 설명해야 할 때는 그 의미를 조금 좁혀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떤 때는 종교적 의미의 ‘복음화’로서 선교를 정의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과 맺는 인간적인 관계로 선교를 정의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선교 현장에서 나는 두 가지 영역의 ‘선교 활동’을 본다. 하나는 교회(교구 · 본당)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선교다. 그 영역에서는 전례와 성사, 교리교육 등을 통해 더 많은 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초대하고 공동체를 키워나가는 활동이 주를 이룬다. 또 다른 영역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직접 만나는 방식의 선교다. 가난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차별받는 이주민이나 감옥에 갇힌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선교활동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여러 차례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한 것처럼, 내가 볼리비아에서 하고 있는 선교활동은 교도소에서 수감자들과 일하는 것이니 두 번째 영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교도소에 갇힌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힘없는 수감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다 끝내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잊히고 마는 현실을 날마다 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이들보다 더 소외되고 더욱 심하게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에이즈(AIDS) 환자들이다.

에이즈, 감추기보다 사회 쟁점으로 다뤄야 바람직하다

에이즈라는 질병이 처음 알려진 이래, 전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의학적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 교육과 환자들을 위한 사회복지 차원에서도 많은 발전과 새로운 인식의 진전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분야가 바로 이곳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의 첫 선교지였던 동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이 ‘에이즈 사목’의 중요성에 대해 눈뜨게 해주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에이즈 환자의 수가 많은 대륙이고 가장 빠르게 이 질병이 확산되고 있는 곳이다(www.unaids.org/en/dataanalysis/datatools/aidsinfo 참고). 그런 만큼 실제로 다양한 정책과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다. 이를 위해 일하는 단체들도 많고 인식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에이즈가 대륙 전체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 이유로 이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더 이상 감추기보다는 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회적 쟁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척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열려 있었고, 그래서 일하기 훨씬 수월한 여건이 되었다.

▲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① 볼리비아의 한 NGO가 에이즈로 숨진 환자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연 세계 에이즈의 날 촛불 기도회 모습, ② 청소년들을 위한 에이즈 예방교육, ③ 원주민 여성 대상 방문교육, ④ 환자 지원 프로그램 중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청년 다비드(왼쪽)

그런데 통계적으로 에이즈 환자 수가 훨씬 적은 볼리비아에 오니 에이즈에 관한 교육과 그 환자들을 위한 도움의 필요성이 어쩌면 아프리카에서보다 더 절실했다. 게다가 이 일을 하기에 볼리비아는 아프리카보다 더 어려운 곳이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볼리비아에서는 에이즈 환자가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문화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에이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의 금기처럼 되어 있어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물론 에이즈라는 질병이 존재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이 동성애로 인한 질병이고,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언가 그럴 만한 나쁜 짓(?)을 했으니 저주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이 너무나 강하다.

또한 볼리비아의 문화 자체가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데다, 그릇된 남성성의 허세와 과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힘을 가지는 탓에 에이즈 이슈를 제대로 다루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은, 가족 중에 에이즈 환자나 HIV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으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겨져 대부분 외면당하거나 심하면 내쫒기고 버려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을 가지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텐데 그것에 덧붙여 수치심과 비난의 시선, 그리고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에이즈 환자들의 삶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내가 만나본 여러 에이즈 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조차 이 문제를 쉬쉬하고만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어떠한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다못해 이 질병에 관련된 실제 통계 자료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있으니 사회적 인식이나 교육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세계보건기구(WHO)의 인터넷 문서 자료(apps.who.int/globalatlas/predefinedReports/EFS2008/full/EFS2008_BO.pdf)를 보면, 이 통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에이즈와 관련하여 볼리비아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2008년 이후의 통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그래프뿐 아니라 문서 내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2008년 이후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 차원의 자료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어떠한 이유로 보고되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에이즈 유병률(有病率)이 높은 순위를 매겼을 때 볼리비아가 100위에 해당한다는 2011년 통계자료(www.unaids.org/en/dataanalysis/datatools/aidsinfo)의 신뢰도는 상당히 낮으며, 실제로 현재 상황은 그보다 훨씬 나쁠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정확한 자료조차 없다는 것은, 이 질병의 확산을 막고 환자들을 돕는 일에 정부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에이즈는 이곳에서 너무나 빠르게 퍼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 “세계보건기구(WHO)의 인터넷 문서 자료를 보면, 이 통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에이즈와 관련하여 볼리비아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2008년 이후의 통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프는 볼리비아의 에이즈 현황에 대한 2008년 세계보건기구 자료 ‘Epidemiological Fact Sheet on HIV and AIDS, Core data on epidemiology and response 2008 Update: Bolivia’의 일부다.

나병 환자 치유한 예수님처럼 에이즈 환자 만날 수 있기를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몇몇 비정부기구들이 외국의 지원을 받아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비교적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이 질병의 예방을 위한 교육과 인식의 전환에 관한 부분까지 다루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가 처음 볼리비아에 왔을 때 그 중 한 단체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접근 방식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말하기를 꺼려하고 모른 척 하려고만 하는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면서도 단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현장을 뛰어다니며 주어진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하는, 볼리비아 문화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방법으로 일하고 있었다. 특히 에이즈 환자나 HIV 보균자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에 맞서 그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인권 보호 프로그램, 산골 마을까지 찾아다니며 환자의 가족들을 일일이 만나 서로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화해하게 하는 가족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보듬고 치유하는 중요한 일인지 배웠다.

병원의 격리된 한 구석에서 외롭게 죽어가면서도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에이즈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매몰차게 무시당하고 내쳐지는지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의 나병 환자들이 떠올랐다. 치과에 갔다가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로 몇 번이나 진료를 거부당한 대학생 이반, HIV 보균자라고 직장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세 아이를 둔 미혼모 파올라, 몹쓸 병에 걸렸으니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나가 산속에서 혼자 죽으라 했다는 어머니를 그래도 그리워하는 시골 청년 다비드, 이 모두가 예수님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사랑하시는 이 시대의 나병 환자들이 아니던가.

이것이 결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리’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고, 판단과 비난의 목소리보다는 따뜻한 돌봄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가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윤주 수녀 (메리놀 수녀회, 볼리비아 선교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