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부활 제5주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을까?’ 그래서 한 단어 한 단어, 한 구절 한 구절씩 천천히 곱씹어 보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우리를 독려하시고, 게다가 그 방법까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과 ‘믿음’

▲ 지오토의 템페라화 ‘성 요한 복음사가’(1325년)
오늘 복음에 대한 이해에 앞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의 특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에는 ‘계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장 큰 계명’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첫 번째 계명이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두 번째 계명(마태 22,34-40; 마르 12,28-34; 루카 10,25-28) 등과 같은 계명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대신합니다. 즉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 그리고 말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어 태어나신 순간부터 이 ‘사랑’은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것도 인류를 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상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었던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예수의 명령입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이런 사상은 성가로도 우리 귀에 익숙한(가톨릭성가 414번)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위 구절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그대로 이어 받아 ‘서로 사랑할 것’을 촉구한 후,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랑은 단순한 사랑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말씀에서도, 그리고 요한의 서간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지 하나의 권고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통한 하나의 계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한 복음사가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이외에 그 어떤 계명도 전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사가에 있어서 이 ‘사랑’은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계명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또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위 죽음과 인류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연결 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또한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1요한 3,16)고 요한 복음사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우리에게 사랑의 ‘동기’이자 동시에 ‘이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서로’라는 개념입니다.

이 ‘서로’는 예수께서 내리신 새로운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한 편의 일방적인 것이 아닌, 광범위하고 그 대상에 대해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이웃 사랑’은 말할 나위 없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마태 5,44)을 명령하십니다. 이렇듯 ‘서로’가 의미하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든지 불문하라는 것이며, 또한 ‘사랑은 상호간에 주고받는 행동이며 태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 체험으로 연결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복음서 첫 머리에서부터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의 온 역사를 통해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리옹의 순교자 성 이레네우스(140~202년)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Adversus heareses)를 통해 “어떤 이교도도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며 그리스도교에서 육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은 곧,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끼기도 힘들었던 하느님의 현존을, 이제 예수를 통해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존재로, 그래서 결국 하느님의 현존을,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성체’를 통해서만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문제는 이 핵심적인 영성을 우리의 생활에서 얼마나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오늘날 하느님, 그리고 예수의 현존 체험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 교회는 흔히 예수의 현존 체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장소로 성사와 전례를 들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례헌장> 제7항에서는 미사와 성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위해 전례, 특히 성체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 현존 체험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현존을 성체에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결국에는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를 체험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예수의 현존은 성당에 가야만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했으며,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우리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할 ‘사랑’과 ‘믿음’의 간격이 자꾸 벌여져 ‘삶’ 따로 ‘믿음’ 따로의 일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믿음’은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회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예수, 우리가 삶을 통해 만나 뵐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갑니다. 2천년 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전례가 아니라, 현재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의 성찬에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을 통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예수의 모든 계시의 기본 개념이며 또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삶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모든 행동과 결정, 그리고 정책 안에서 이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를 설립하여 도시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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