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14]

이집트 서부 사막을 대표하는 오아시스 도시 시와를 출발하여, 모로코의 여행자가 운전하는 캠핑카에 올라 광활한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마르사 마트르(Marsa Matruh) 해변에 이르는 동안, 베르베르인 소년 카미스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난생처음 시와 오아시스 지역을 벗어나, 저 유명한 지중해의 중심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방문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카미스의 기분은 한껏 들떠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무릎이 너덜너덜 찢어진 청바지와 낙타가 그려진 헐렁한 반팔 티셔츠 차림에 요상한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난 카미스와 환호성을 지르며 캠핑카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내부 구조는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몽골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천막 형태의 이동주택 게르(Ger)를 연상시키는 캠핑카의 뛰어난 내부시설 가운데, 나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책꽂이였다.

거실 겸 서재로 사용하는 작은 공간 위에 2단으로 가지런히 부착된 책꽂이에는, 각종 희귀본 고서(古書)가 빼꼭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랍어는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전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 분량의 영문 서적들이 그동안 내가 실크로드 육로-해로-초원로에 맞춰 세계문화기행을 구상하면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책이었다.

마르사 마트르 해변을 출발하여, 마리우트(Mariut) 호숫가에 있는 ‘아부 메나 기독교 유적지(Abu Mena-Christian ruins)’를 순례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무관심한 척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캠핑카의 이동식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한 권의 책에 쏠리고 있었다. 비록 아랍어를 읽을 줄 모르지만, 책상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각 대륙별 지도 더미 속에서 발견한 낡은 책자의 표지 위에 흑백으로 인쇄된 고대의 등대를 발견하자, 단번에 그 책이 중세 아랍 최고 여행자로 알려진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의 여행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광장, 알렉산더 대왕의 흉상 ⓒ수해

나일 삼각주 서부 가장자리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되어, 약 천 년 동안 이집트의 수도로 자리매김해 온 유서 깊은 항구도시다.

기원전 356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년 재위)은 승부욕이 유난히 강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사(戰士)로서의 천부적인 육감과, 잔인한 성격과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동시에 지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화에 대한 열정과,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받은 뛰어난 지성을 바탕으로, 20세에 왕위에 올라 동방 원정에 나선지 7년 만에 그리스에서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에게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를 모조리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어서 곧장 이집트로 진군한다. 당시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비결이 있었다. 한 가지는 오랜 세월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로서 가혹한 수탈과 압정에 시달려오던 이집트인들의 잠재된 분노가 주요 원인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의 전통 신(神)을 함부로 배척하지 않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카이로 북동 교외에 있는 고대 이집트 태양신 신앙의 중심지인 헬리오폴리스와 네크로폴리스(죽은 자의 도시)를 대표하는 지역인 멤피스를 여행하면서 이집트 전통 신에게 차례로 경의를 표한 알렉산더 대왕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590㎞ 떨어진 시와 오아시스로 달려가 ‘아몬의 신탁(神託)’을 받는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아몬은 그리스인들이 모든 신들의 왕이라고 부르는 제우스(Zeus)에 해당하는 신이었다. 때문에 당시 이집트를 정복한 그리스인들은 ‘아몬’을 지칭할 때 ‘제우스 아몬 신’이라고 불렀다.

시와 오아시스에서 아몬 신전의 사제로부터 ‘제우스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은 알렉산더 대왕은, 멤피스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올리고 공식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정복지를 확장시켜나갈 적마다 그곳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고대 그리스 문화와 정복지의 토착문화를 융합시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조를 탄생시켰던 알렉산더 대왕은, 다시 동방 원정에 나섰다가 도중에 열병을 얻어 바빌론에서 돌연히 병사하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시와 오아시스, 아몬의 신탁 신전 ⓒ수해

총명한 두뇌와 남다른 심미안(審美眼)의 소유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 당도하여, 마리우트 호수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라코티스(Rhakotis)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반원형(半圓形)해안선을 발견하자, 이곳이야말로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훌륭한 해군기지이자 무역항이 될 뿐만 아니라, 그가 꿈꾸는 새로운 제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간파한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지중해 연안의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라코티스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누구보다도 빨리 간파해낸 알렉산더 대왕은, 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항구도시에 그의 이름을 본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가장 먼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 ‘뮤즈(Muse)’에게 헌정할 대규모의 도서관 설립을 꿈꾼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지 토착문화와 그리스 고대문화의 뛰어난 융합정책은, 그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에 힘입은바 크다. 일찍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적 향연을 맛본 알렉산더 대왕의 풍요로운 정신세계는, 그의 사후(死後)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년)를 개창한 그의 휘하 장군을 통하여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 육로와 해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국제 무역 중심지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세계의 석학과 예술가들을 영입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건립된 왕실 부속 연구소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출발한 이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51∼30년 재위)의 치세 때는 무려 70만권 가량의 두루마리 책을 보유한 세계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급성장하였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주 열람실 외벽에 새겨진 120종류의 다양한 문자 ⓒ수해

건립 초기부터 세계 최고 지성의 전당임을 자부하던 이 도서관에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헬라어(그리스어)로 최초 번역되는 대규모의 역경(譯經) 작업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 성경 번역작업이 이루어진 시대적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민족 융화정책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상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오랜 ‘디아스포라(Diaspora, 실향)’로 인해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생존을 위해 당시 국제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의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70인역(LXX)’, ‘알렉산드리아 역본(Alexandria Version)’ 혹은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는 이 헬라어 성경은, 삽시간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데 절대적으로 공헌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전설적인 도서관은,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해안에서 발생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방화(放火)를 필두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여, 4세기 말엽에는 완전히 소멸되는 비운을 겪는다.

현재 알렉산드리아 해안 동쪽 엘 샤트비(El Shatby) 거리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002년에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리는 의미로 새롭게 개관한 건물이다. 알렉산드리아 대학에 의해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학문과 예술의 상징이었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부활’시키자는 논의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유네스코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고대 도서관이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새롭게 건립되었다.

유네스코에서 주최한 공모에서 채택된 노르웨이의 어느 건축회사에 의해 건립된 초현대식 시스템을 구비한 이 도서관의 외양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바다에서 막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해 놓은 원반형 유리지붕의 일부가 주 열람실 외벽을 에워 두르고 있는 인공연못의 푸른 물속에 비스듬히 잠겨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이 독특한 건물의 외벽에는,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는 약 120종류의 다양한 문자를 새긴 석판이 모자이크처럼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월, 강, 의, 세, 름, 관’ 등 여섯 글자가 새겨진 우리나라 한글은 단연코 돋보였다.

▲ 알렉산드리아 해변에 우뚝 서 있는 성 마르코의 순교기념비 ⓒ수해

원반형의 유리지붕을 통해 태양광이 직접 비춰들어 전체적으로 밝고 탁 트인 구조를 하고 있는 11층의 초현대식 건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내부 전시관을 차례로 둘러보는 동안, 캠핑카 안에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발견한 순간부터 막연히 짐작했던 바대로, 모로코에서 온 건축학자 부부는 상설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의 ‘파로스 등대’ 복원도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븐 바투타의 여정을 따라서 모로코에서 출발하여 리비아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까지 들어온 이 건축학자 부부의 왕성한 학구열은, 당분간 날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각종 고문서를 모조리 섭렵한다고 할지라도, 도무지 만족할 것 같은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한 시와 오아시스 소년 카미스는 점차 지루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결국 몇 가지 합의하에, 저녁때 알렉산드리아 여행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드 자그루르 광장’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일단 모로코의 나그네들과 헤어졌다.

한참 후, 카미스와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람실 외벽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 보았다. 거대한 화강암 벽을 비스듬히 에워 두른 인공연못 가득히 채워놓은 푸른 물을 통해, 마치 도서관 건물과 지중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대건축의 뛰어난 조형효과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가다 보니, 저만치 해안도로가 지나가는 반원형의 제방 위에 우뚝 서 있는 ‘성 마르코 순교 기념비’가 놀랍도록 강렬한 몸짓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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