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거리 미사에서 만난 사진장이 달군 또는 서경렬에 대하여

▲ 그는 사진이 건네는 말이 먼저 전달되기 때문에 흑백사진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피사체가 갖는 그 자체의 모습을 전하는 것, 그것이다. ⓒ정현진 기자

여의도 시국미사, 대한문 생명평화미사, 평택역 앞 쌍용차 거리 미사, 강정의 평화를 위한 미사, ‘불을 놓는 불씨’ 미사, 용산 생명평화미사, 콜트콜텍 현장미사…….

언제부턴가 카메라를 든 낯선 청년을 현장 미사 취재 때마다 만나게 됐다. 길거리 미사에서 만나는 사람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일뿐더러, 가끔 취재를 나가는 현장에는 거의 매번 그가 있었다. 4년째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제 으레 “달군 왔어?”라며 그를 찾고, 보이지 않으면 “왜 안 왔냐”며 따져 묻기에 이르렀다.

항상 전문가의 분위기를 풍기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처음에는 사진 기록을 부탁받은 줄 알았다. 몇 번 나오다 말겠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 계속 만나게 된다. 참 궁금했다. 거리에 항상 서 있는 이유가.

사진은 ‘귀찮은 즐거움’

사람들은 그를 서경렬(베네리우스)이라는 이름 대신 ‘달군(달나라 군사)’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한창 나이에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에 대해 그는 “어딘가에 소속되면, 자기만의 사진을 찍는 것이 힘들어진다. 조직의 일정한 방식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며 “내 마음대로 찍고, 편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돈 못 벌면 한 끼 굶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호기로운 말과 함께.

그가 사진 찍는 사람이 된 사연도 남달랐다. 중학교 때부터 회화반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그림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예술계로 진학하지 못했고, 대학은 엉뚱하게도 화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직후,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와서 학교를 그만뒀다.

▲ “돈 못 벌면 한 끼 굶으면 되지.” 제 길을 찾는 시간,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쏟는 기운이 결코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달군이다. ⓒ정현진 기자

집에도 알리지 않고, 6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군대에 다녀왔다. 제대 후, 그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찾아다녔다. 출판사 교열부, 회계경리, 인형 파는 노점상, 스포츠센터 기계 관리 등. 그러던 중, 우연히 TV 뉴스를 보는데 카메라 기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라는 생각에 학원에 들어갔고 방송사(KBS)에서 3년 가까이 보도부 스텝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체격 조건상 험한 취재현장에서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선배들이 사진을 권했다. 1998년 사진학과에 입학하자, 학교를 그만뒀을 때도 별말 없이 그를 지켜봤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길이 네 길인가보다.”

“그림을 완전히 포기하니까, 사진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이 눈에 들어왔지. 있는 그대로를 찍어낸다는 것, 특히 흑백사진에 매료됐어. 작가의 의도를 분석하는 예술사진 공부도 정말 재미있었고.”

졸업을 앞두고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취업을 택했다. 가구 광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인물 사진에 관심이 가 선배 스튜디오에서 결혼식, 프로필 사진을 찍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조명이나 피사체를 대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진가로서 지금 그가 가장 관심 갖는 분야는 다큐멘터리다. 원래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지만, 가끔 무대처럼 공간과 사람을 배치해 메시지를 구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인위적 장면은 회화지 사진이 아니라는 논쟁이 있기도 하지만, 그 틈새로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이 그의 욕심이다. 그는 “그렇지만 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그것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도 예술 아니겠느냐. 있는 그대로든, 만들어낸 것이든 다만 현실을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사진은 ‘귀찮은 즐거움’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매는 순간 차를 타기보다는 걷게 되고, 길에서 만난 수많은 것들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 요즘 인물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다면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표정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간혹 인상을 쓰기도 하는 그 순간, 사람은 은연중에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면서 “그 사람이 보여주기 원하는 A나 B라는 모습 사이에 있는 C를 포착하고 싶다. 그러려면 그 사람과 친해져야 하고 원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라고 전했다.

▲ 지난해 3월 5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첫 폭파가 시작됐을 때, 달군과 친구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정현진 기자

“성당 밖에서의 외침을 전하는 것도 옳은 일 아니겠나”

그가 졸업 직후 사진 유학을 포기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평범하지 않다. 적어도 세례를 받고 여의도 미사에 갔던 4년 전부터는.

어느 날 문득 성당에 다니고 싶어서 세례를 받았다.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있던 중, 친구가 ‘오체투지’에 참여했다는 것과 그 친구가 신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왜 성당 밖에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묻는 그를 친구는 여의도 미사에 초대했다. 멋모르고 따라간 거리 미사에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신자들과 신부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렇다면 뭔가 옳은 일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호기심과 의문이 들었다. 친구를 통해 정의구현사제단 간사를 소개받았고, 도울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제 막 기도문을 외웠을 뿐인 새내기 신자에게 처음으로 접한 장면의 의미는 너무 어려웠고 갈등의 대상이었다. 신부님들에게 “왜 거리에서 미사를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며, 이른바 밥상 교리, 술자리 교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성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 우리가 무언가 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옳은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현장 미사를 지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사진을 찍는 것이라 현장 사진을 찍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 이렇게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을 주로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 또한 현장감 때문이다. 신부님들의 화려한 영대보다는 현장의 이야기를 먼저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한두 번 미사에 참석하고 현장을 만나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 나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줬으면 좋겠고, 나 역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가 나를 그곳으로 부르는 것 같아.”

▲ 그가 지금껏 알아온 예수는 제 속내를 털어놓고, 언제든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그런 형님이요, 벗이라고 한다. ⓒ정현진 기자

친애하고 존경하는 벗, 예수

예전에 방송국을 다니면서 접했던 현장이 그냥 화면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그가 만나는 현장은 그에게 말을 걸고 만나게 하는 현장이다. 그토록 열심히 거리 미사에 나오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 세례를 받을 때 나는 예수를 형님으로 모시자는 생각이었어. 집에 들어갔는데, 아주 친한 선배가 와서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느낌. 소주를 마시면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는 형님이 내가 만나는 예수의 모습이야. 절대적이고 위대한 먼 존재보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장 가까이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형님, 친하고 존경하는 친구, 벗.”

세례를 받은 지 4년, 그에게 예수는 이런 존재다. 벗 같고 형님 같은 예수와 어떤 대화를 하냐고 했더니 주로 따지는 편이라고 했다. 집에서 홀로 현장 사진을 정리할 때,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제대로 메시지를 전할지 고민하면서 이렇게 말을 건넨다.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좀 그 사람들 안아주지……. (섭섭하다는 건 아니고요.) 이제 저 사람들 이야기 좀 들어주면 좋겠어요.”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면서, 누군가 만들어놓은 장치에 완전히 걸려든 느낌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다못해 친구 관계도 달라졌다. 전에 사귀었던 친구들을 만나면 자꾸 의견 차이를 보이니까, 요즘은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가장 친한 벗이 됐다.

언제까지 현장에 나올 것 같냐고 했더니 “요즘 가장 큰 고민이 그것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것인지 모르겠다”며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어서도 계속 나갈 것 같다. 어딜 가든, 언제까지든 어렵고 소외받는 이들, 손잡아줘야 할 이들은 있을 테니까. 그것을 기억하는 한 가겠지”라고 답했다.

그의 꿈은 “그냥 결혼하고,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사는 것. 시골에서 조용히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소박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 그는 “그렇게 살려면 세상부터 조용해져야 하지 않겠나. 누구나 웃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가능하겠지. 그러니까 아, 좀 조용히 삽시다!”라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의 꿈은 이제 홀로 소박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웃는 삶이 됐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끼어든 덕분에 더 갈등하고 고민하게 됐지만, 그가 ‘사진’을 귀찮은 즐거움이라고 말했듯, 그는 이제 고통 속에서 함께 꿈을 꿀 줄 안다. 아주 나중에 머리가 하얗게 샌 채로 카메라를 매고 “달군 왔어?”라는 인사를 받는 그의 모습이 기쁨일지 슬픔일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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