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성소 주일에 부쳐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동료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찾기 위해 세상의 다른 쪽 끝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제3세계인 라틴아메리카의 한 추기경이 교황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륙은 오랜 식민통치와 군사정권으로 오랫동안 ‘슬픔의 대륙’이었지만, 기질상 축구와 축제를 즐기는 ‘기쁨의 대륙’이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이 누리는 독특한 ‘행복’을 보여준 대륙에서 하느님께선 당신의 도구를 찾으셨다.

이처럼 ‘부르심’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교황에 대한 염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서는 가장 지저분한 짐승의 거처에서 복음을 시작하셨다.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고, 이분께 경배 드리는 첫 번째 미션은 ‘밤을 지새던 목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아기 예수의 첫 번째 거처에서 발견한 것은 ‘포대기에 쌓인 채 말구유 위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였다. 그분은 가장 남루한 곳에서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기로 작심하셨던 것이다.

▲ 지오토의 작품 ‘예수의 탄생’(1306년), 이탈리아 파도바 아레나성당의 프레스코화
‘성소’란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되었다는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신분과 자격에 점수를 매겨 사람을 부르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 교회 전통 안에서 ‘성인’이란 흠결 없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처럼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다교에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던 바리사이도 아니었다. 목수의 어지러운 작업대 아래서 놀았으며, 죄인들과 어울리고, 더러운 병자들과 손을 잡았다. 평정심을 오롯이 유지하지 못하고 나자로의 죽음을 맞아 슬픔에 잠기거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기도 했다. 때로 난폭하고 때로 사랑스러웠던 인물이었다. 하느님께선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예수님은 온몸으로 응답했다.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했으며, 모세는 살인자였다. 다윗은 불륜을 저질렀으며, 시몬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하고, 바울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고 한 것처럼 자신의 ‘바닥’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부도덕함과 무능함과 사랑 없음을 인정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안셀름 그륀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칼 융의 말을 빌어 “우리 자신은 하느님이 탄생하시고자 하는 하나의 마구간”이라며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처럼 매우 지저분하다”고 말했다. 그륀은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고 전하며,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1)하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사제로 부르심을 받거나 수도자로, 또는 평신도로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다. 부르심은 신분이나 직업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은 “다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남겨 놓은 사랑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유명한 아빌라의 데레사가 남긴 전언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께서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밖에는
그분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하여
이 세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발로 세상을 다니시며 선을 행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이 그분의 손이며
당신의 발이 그분의 발이며
당신의 눈이 그분의 눈이며
당신이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제도 되고, 수도자도 되고, 평신도로 살아가지만, 그 신분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연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서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그분께 받은 사랑을 오롯이 내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그 길을 걷는 동안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얻고,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하다.

사제가 다 똑같이 사목하지 않고, 수도자들도 카리스마가 다르고, 평신도들은 서로 다른 현장에서 서로 다른 몫을 지불하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이승을 건너가는 여정에서 여전히 지저분한 마구간 같은 내면을 경험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조금씩 청소해 가면서 회심의 날을 손꼽고 있다. 오늘 내가 살아낸 만큼 세상은 아름다워졌다고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동반자’임을 확인한다. 서로 조금씩 부족해도 동행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예수님도 그 길에서 동행이 필요해서 제자들을 불렀다. 그가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어쩌면 ‘일방적인 섬김’보다 ‘평등한 연대’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자, 하느님 안에서.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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