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기획 ‘보호 대신 자유를’ - 3]
꽃동네에서 21년 살다 자립한 윤국진 씨

집에서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휠체어를 탄 그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보다 집이 편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실은 그의 공간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휠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방이 어떤 모습인지, 혼자서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그의 일상이 어떤 것인지 머리로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10명 중 1명이 장애인인 한국 사회에서 중증 장애가 있는 지인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 중곡동에 도착해서 그가 알려준 주소를 들고 한참 동안 헤매는데 새로 지은 듯 깔끔한 빌라 2층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의 활동보조인 구경서 씨다.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2층이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바로 현관까지 연결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동휠체어에 누운 윤국진 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예상대로 두 개의 방과 욕실, 거실로 이뤄진 그의 집에는 문턱이 없고 화장실 문도 미닫이 식이다. 룸메이트와 그의 활동보조인에게 인사를 나누고 국진 씨 옆에 앉았다.

▲ 21년 동안 꽃동네에서 살다 자립한 윤국진 씨 ⓒ문양효숙 기자

시설을 나와 가장 좋은 건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자유

올해 서른여덟인 윤국진 씨는 2011년 1월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나왔다. 열다섯 살에 시설에 들어가 꼬박 21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21년 동안 국진 씨는 ‘규칙적으로’ 살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났고 11시 반, 4시 반에는 식사를 했다. 그는 시설을 나와서 가장 좋은 건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단체로 먹잖아요. 맛없어도 먹어야 하고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해요. 그것도 있을 때 왕창. 그게 싫었어요. 내가 동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끔찍했어요.”

시설에서는 한 방에 적게는 아홉 명, 많게는 열여덟 명이 함께 살았다. 두세 명 정도였던 직원은 청소와 대소변 치우는 기본적인 일을 했다. 시설 안에서 어딘가로 움직이고 싶을 땐 봉사자들도 있었지만 거동이 가능한 다른 장애인의 도움을 받았다. 프라이버시도, 혼자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숨기고 싶은데 다들 알고 있는 거예요.”

밤마다 직원들 몰래 술을 마셨다. 시설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그거라도 안 마시면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었다.

2003년 시설 내 수녀의 소개로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회(현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에 가입했다. 교육을 받던 중 장애인들이 집회를 열고 경찰과 싸우는 영상을 봤다. 충격이었다. ‘시설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몇 번의 시도는 계속 무산됐고 시간은 흘렀다. 먼저 시설을 나가 결혼하고 야학도 다니는 형을 보면서 자립하고 싶은 마음은 점점 더 커졌다. ‘형도 되는데 나는 안될까?’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시설을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 시설 직원들은 “네가 나가서 잘 살 수 있겠냐?”고 말했다. 친하게 지내던 직원은 “한번 나가 살아봐야 세상 험한 걸 알지”라고도 했다. 그중에는 “그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가야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 지난해 여름 윤국진 씨는 노들야학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간 날이었다. (사진 제공 / 윤국진)

시설에서 살 때,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건 상상도 못했다

막상 자립을 고민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집이었다. 장애연금과 기초수급비로 생활비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던 국진 씨 앞으로 장애인연금 15만원(지금은 17만원)과 수급비를 합쳐 한 달에 50~60만원 정도가 정부에서 나왔지만, 장애인연금의 절반인 7만원이 국진 씨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액 시설 생활비로 들어갔다.

그때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장애인 주거 지원 프로젝트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17명을 뽑아 주거 지원을 하는 사업이었다. 국진 씨는 이 사업에 선정돼 시설을 나올 수 있었다. 3년간 한시적인 지원이었지만, 첫 문을 여는 게 중요했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시설을 떠나는 날을 며칠 앞두고는 ‘15년 동안 여기서만 살았는데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갑자기 아플 때도 있을 텐데 어떻게 하나?’ 등 여러 가지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자립생활이 시작되자 적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노들야학이 큰 힘이 됐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 혜화동 노들야학에 나가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장애등급제 폐지와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를 요구하며 200일 넘게 천막농성 중인 420농성단이 있는 광화문역에도 간다.

중곡동에서 혜화동, 중곡동에서 광화문. 그에게는 먼 여정임에 분명했다. “가장 힘든 게 이동”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야학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용기를 얻고,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한다. 게다가 시설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함께 사회에 목소리를 낸다거나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해봤다”고 했다.

▲ 윤국진 씨와 활동보조인 구경서 씨. 1년여의 적응기를 거쳐 이제 이들은 서로 손발을 맞춰 살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문양효숙 기자

장애인 생명과 직결되는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

혼자서는 숟가락조차 잡을 수 없는 국진 씨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활동보조서비스 덕분이다. 그는 한 달에 총 570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다. 처음 시설을 나올 때 그가 받은 활동보조서비스는 보건복지부에서 제공하는 100시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하루 3시간 활동보조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머지 시간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국진씨는 서울시, 광진구 등에 찾아가서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했다. 1년 넘게 국진 씨의 활동보조를 하고 있는 구경서 씨는 “자동으로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데 당사자가 해당 관공서에 달려가서 요구하지 않으면 제공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는 장애인들의 생명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국진이는 잘 때 팔을 침대에 묶어줘야 해요. 밤에 무슨 불상사가 생겼을 때 혼자 있다면 전혀 방어할 수가 없어요. 활동보조서비스가 24시간 제공됐다면 김주영 씨도 그렇게 가지 않았을 거예요.”

* 뇌병변장애인이었던 고(故) 김주영 씨는 지난해 10월 26일 활동보조인이 밤 11시에 퇴근한 후 발생한 화재로 질식사했다. 다섯 걸음 정도만 움직이면 살 수 있는 거리였고 불은 10분 만에 꺼졌다.

국진 씨는 자립한 뒤 자신이 있었던 꽃동네에 몇 번 찾아갔다. 직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설에 사는 이들은 국진 씨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시설에 다녀온 날에는 자립생활에 관한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국진 씨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시설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나같이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도 나와서 사니, 너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자립한 후 힘든 건 없냐고 묻자 국진 씨는 “혼자 사는 건 만만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가 좋으면 한 가지는 나쁘고 그런 거죠. 내가 선택했으니까 감수하는 거고. 다 그런 거 아니예요?”라며 웃는다. 뭘 먹을까, 어디를 갈까, 누구를 만날까. 이런 모든 질문에 순간순간 선택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지금의 삶이다. 선택할 수 없었던 15년의 시간 덕분일까. 국진 씨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만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라는 것을.

국진 씨의 집을 나서는 길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그것이 삶이지. 누구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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