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부활 제4주일 · 성소 주일)

▲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작품 ‘착한 목자 그리스도’(1660)
오늘은 부활 제4주일입니다. 또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번 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양떼를 돌보시는 착한 목자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교회는 매년 부활 제4주일을 ‘성소 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목자이신 것처럼 우리 가정에서, 주님의 목장에서 당신의 양떼를 위해 봉사할 많은 성소자들이 나오기를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주일은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성소 증진을 목적으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64년 2월 24일에 제정하셨습니다. 또한 그 이듬해인 1965년 10월 28일,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nstitutione Sacerdotali)을 발표함으로써 사제 육성을 적극 독려하셨습니다.

목자와 양떼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목자’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양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며, 또한 목자는 양들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요한 10,27). 목자와 양의 관계가 동시에 하느님과 하느님 자녀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목자’와 ‘양떼’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목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척박한 유목 환경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들이 마치 목초지를 배회하는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은 처지라는 것입니다. 이에 자신들을 지켜줄 유일한 ‘목자’는 하느님뿐이라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신앙은 구약성경에서 잘 드러납니다. 시편에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양떼인 자신들을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시고, 물가로 이끄셔서 물을 마시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목자가 해결해 준다는 것이지요. 또한 자신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적이 침입해 와도 목자의 막대와 지팡이가 있어서 위안이 된다는 것입니다(시편 23,1-4).

교회는 이런 유대인들의 목자와 양떼의 관계, 특성을 잘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이해는 교회 안의 각 지체들의 관계에 적용되었습니다. 즉 교회를 이끌고 있는 성직자들을 ‘목자’로, 그리고 평신도들을 ‘양떼’로 이해했으며 이는 교부들을 포함한 교회 전통 안에서 현재까지 그대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성소의 종류별로 값어치가 다를까

우리가 오늘 부활 제4주일을 경축하며 동시에 성소 주일을 기념하는 이유도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사고와 관계가 깊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의 사고와 더불어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소 주일을 맞아 기념해야 하는 대상의 문제입니다.

과연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행해온 것처럼, 성소 주일에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만 기념해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소 주일은 사제 성소의 증진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오늘날 우리는 수도 성소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소(聖召)라는 말 그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거룩한 부르심’ ‘하느님의 부르심’은 원천적으로 계층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우리의 보편 성소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성원을 직무에 따라 목자와 양떼로 구분해 왔습니다. 이는 교회가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인식을 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성직자와 수도자는 완덕의 신분이요, 평신도는 가르치는 대로 충실히 따르면 그만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교회에 이런 사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한편 교회는 성직자나 평신도 모두 같은 주님의 양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보편 성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제며, 또한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본래 성소에 그 가치의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각자 맡은 고유한 직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성소가 교회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성소 주일에 다시 생각하는 ‘보편 성소’

성소 주일을 맞아 단순히 신학교나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마련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의 증진을 기대하기는 역부족입니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일정 부분 순기능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제한된 효과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소의 증진은 이벤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삶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고 그 삶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일 때, 성소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입니다.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소출을 얻을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사제 성소도 수도 성소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보편 성소에 그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 평신도 없이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존재할 수도, 그리고 존재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를 사람이 없는데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소 주일인 오늘,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우리의 보편 성소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성소를 위해 마음을 모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2)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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