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온 용어 ‘수도생활’, 오해와 정체성 혼란 불러와

사진 제공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수도생활, 축성인가 봉헌인가?
그게 그거 아냐?

명민한 독자들은 이 제목이 잘못된, 적어도 부적절한 개념설정에 기초함을 즉시 알아차리고 의아해 할 법하다. “서원을 통하여 …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참조: 교회헌장 44; 교회법 573조 ①)의 삶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수도생활? 봉헌생활? 축성생활? 셋 다 그게 그거 아닌가? 아무거나 골라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질문에 당황하면서 ‘축성’과 ‘봉헌’ 중 어떤 것이 맞는 답인지 고민하거나 자신이 수도생활자인지 축성 혹은 봉헌생활자인지 헷갈려 하는 수도자들이 적지 않음을 필자는 여러 기회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이런 도발적인 제목을 제시하는 배경이다. 적어도 2012년 8월 수도자 장상연합회 발신 공문으로 라틴어 vita consecrata의 한국어 번역에 대한 주교회의의 결정을 각 수도회에서 전달받기 전에는 말이다.

모든 신자에게 관련된 이 결정이 교회 안에 얼마나 알려졌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듣기론 대체로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왜 모든 신자에게 관련된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에게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축성생활>(vita consecrata) 3항의 가르침으로 답한다.

“‘축성생활은 우리 모두의 일’(de re nostra agitur)이라는 것을 주교들은 시노드에서 자주 재확인하였습니다. 실제로 축성생활은 교회 사명의 결정적 요소로서 교회의 바로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축성생활은 ‘그리스도인 소명의 내적 본질’(선교교령 18)을 나타내고 한 분이신 그 신랑과 일치하려는 신부로서 교회 전체의 노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 영역본에서 옮긴 천주교 중앙협의회의 번역이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어 필자가 이태리어에서 옮긴 사역이다.)

참고로 이 문헌은 “주교들과 성직자들, 수도회와 수도단체, 사도생활단과 재속회, 모든 신자들”을 수신자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수도생활 교령 다음으로 많이 알려지고―알려진 만큼 읽혀지고 이해되는지는 몰라도― 중요한 이 문헌, <봉헌생활>로 알려진 이 문헌이 여기에선 왜 <축성생활>로 변했는지 계속 머릿속 물음표를 떼지 못하는 분들 못지않게 필자도 난처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문맥상 불가피하게 우선 그 단어를 써야 하겠고, 이 설명은 다음호에 주어지겠다.

‘수도생활’ 유감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아마도 이 셋 중 가장 친숙한 단어일 ‘수도(修道)생활’의 한자를 보자면 ‘도를 닦는 삶’이 되겠다. 실제로 도를 닦아 기필코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수도원에 온 사람도 있을 터이고, 성직자나 신자들은 수도자의 우선적 임무는 도를 닦는 일이라고 믿어 그 임무에(만) 몰두하라는 권고, 혹은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 ‘도’가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무엇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좌우지간에 ‘수도’(修道)라는 용어는, 대충 거칠게 말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삶의 형태를 본받아 복음의 권고들을 서원하고 실천하면서, 또 교회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명에 참여하며 그분을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혹자는 이른바 성화(聖化)를 위한 삶, 곧 성인이 되기 위한 삶이 수도생활이기에 성불이나 득도를 목적으로 하는 여타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거룩해지는 의무를 세례 받은 모든 신자가 받는 부르심이요 의무라는 소위 ‘보편 성화성소’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필자는 종종 “저는 닦을 ‘수’(修)자 수녀가 아니고 받을 ‘수’(受)자 수녀예요. 닦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훨씬 쉽고 유익하거든요. 은총을 받고, 도움을 받고, 선물도 받고…….” 농담이지만 일견 진실을 감추고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기원하는 이 삶에서는 자기 힘으로 노력하고 인간적 의지로 애쓰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의 힘이 우선이기에, 수도생활이란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신뢰하면서 교회와 이웃과 공동체의 도움과 기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다.

어쨌건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교와는 애당초 출발점과 목적점이 다른 불교의 개념 ‘수도생활’이라는 말을 써 오고 있다. 그래서 성직자도 평신도도, 종종 수도자 자신들도 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갈등과 오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 정확한 말, 혹은 대안이 무엇인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만이 아니라 이 분야의 신학자들의 고민은 긴 문장으로 설명되는 그 내용과 실제에 충실한 단어, ‘수도생활’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아내지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더 정확하고 적절한 용어를 찾아낼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를 계속 먹을 수밖에.

사진 제공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한국어로 ‘수도생활’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vita religiosa나 다른 서양언어들도 이 삶의 신학적 내용에 정확히 부합하는 명칭이 아니긴 하다. 문자 그대로는 종교생활, 신심생활이라는 의미로, 꼭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수도생활에 이 표현을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 교회적 합의다. 또한 특정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통용되는 일종의 형식개념이다. 그러나 한국어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정서적으로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수도생활’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교의 삶에 덧씌워짐으로써 그 고유의 특징들이 무시되고 불교적 성격으로 오인되는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혹자는 그래서 ‘봉헌생활’이나 ‘축성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로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봉헌’이라는 표현이 이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미사 봉헌이나 예물 봉헌에서와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봉헌’과 ‘생활’의 관계는? 봉헌하는 삶인가, 봉헌된 삶인가?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무엇을) 왜 봉헌하는가? 이 신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연 봉헌인가? 이 말에는 인간의 행위만 드러난다. 하느님이라는 궁극적 동기 없이.

‘축성생활’은? ‘축성’이라는 표현은 또 이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성당 축성, 자동차 축성, 빵과 포도주의 축성과 그 의미가 같은가, 다른가? 누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왜 축성하는가? 이 모든 것은 다음 호에서나 다루어지겠다. 여기에서는 우선 ‘수도생활’과 ‘축성생활’, ‘봉헌생활’은 동의어가 아니고, 대체 가능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만 밝혀 둔다.

‘수도생활’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이 없다. 이 삶의 출발점이고 토대이며 목적인 하느님도, 이 삶의 모델이요 스승인 그리스도도, 그분의 역할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삶의 기본인 복음도, 복음적 권고도, 사명도 들어 있지 않다. 주로 인간적 노력이 부각되는 수행 차원만 드러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본받고자 주요한 복음적 권고를 서원하고 공동체로 살면서 설립자의 은사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이 정녕 우선적으로 ‘도를 닦는 자’인가? 그것뿐인가? 노자 사상의 핵심인 ‘도’(道)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또 다른 명칭으로, ‘수도생활’이라는 말이 쓰이기 전 고대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삶이 시작될 때 불리던 ‘복음적 생활’이 있다. 우리가 아는 실제의 본질을 비교적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평신도나 성직자의 삶은 복음적인 게 아닌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특히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을 복음적 삶으로 부르고 계시지 않는가? 곧 이 단어도 ‘수도생활’이라고 불리는 삶의 형태가 지닌 고유성(특수성)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삶이 신학적으로 과연 얼마나 어떻게 고유하고 특수한 것인가 하는 것은 공의회 이후 등장한 신학적 쟁점 중 하나이므로 지금은 접어두고, 사정이 허락하면 이 연재의 후반부에 다루어질 것이다.

정확하지 못한 언어 사용과 정체성 혼동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서 정확하고 적절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명칭의 의미와 용법에 따라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고 그 의식이 삶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태초의 혼돈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말은 실제에 영향을 준다. 특히 교회의 삶 안에서 용어들의 언어학적 · 신학적 정확성과 사목적 적절성 여부는 단지 관념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의 삶, 곧 신자들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대부분 언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따라서 정확하지 못한 언어를 쓰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우리의 실제 삶도 그 잘못된 이해를 따라가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수도생활과 관련된 용어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자다운 삶을 더 철저하게 살려는 형태를 불교나 도교적 의미인 ‘수도생활’이라고 불렀기에, 우리는 열심히 도를 닦는 것이 이 삶의 본질인 줄 알고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터한 존재적 · 신비적 차원보다는 수덕적 차원을 훨씬 더 강조하는 정체성의 오류를 오랫동안 범해 왔다.

실제로 명칭은 어느 정도 본질을 드러내고, 따라서 정체성을 반영한다. 명칭이 실제를 반영하는 정도에 따라 그 명칭의 정확성, 적절성이 좌우된다. 여기서 명칭은 임의로 만들어지거나 개인들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의 협약에 의해 형성된 용어를 말한다. 수도생활, 축성생활, 봉헌생활, 수사, 수녀 등의 용어는 실제 삶과 신분의 본질, 곧 신학적 · 영적 정체성을 얼마나 드러내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현재 수도생활에 관한 담론 중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정체성의 위기’라는 말일 듯하다. 대체로 정체성의 주체를 세 가지로 말한다. ① 개인 ② 단체(수도회) ③ 삶 자체(수도생활). 이 글은 ③과 연관될 것이다. 곧 수도생활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형태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이후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이 삶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체성 인식 강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다음 호에서는 관련 개념들의 적절한 표현과 신학적 이해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국춘심 수녀 (방그라시아, 성삼의 딸들 수녀회)

* 이 기사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3년 봄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