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우의 그림 에세이]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리 두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서로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

오래 전 들은 이야기다.
이른바 비극으로 끝난 평강 공주 이야기라고나 할까?
지금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화젯거리가 아니지만
예전에는 ‘사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이 내걸리고 소를 잡아 동네잔치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출세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졌으니까.

가진 것이 없는 남녀가 만나 오랜 세월을 아내가 생활을 책임지면서
가난한 시댁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여 결국 남편은 사시에 합격했다나?
고진감래 격으로 좋은 세월만 남은 줄 알았는데
결국엔 부부가 헤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남편의 배은망덕에 대해 비난과 성토를 했는데
그 남편의 얘기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마냥 아내 편만 들 수도 없었다고…….

그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하루에도 수없이 전화해 일정 파악은 물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었다나?
아내는 지난 세월의 헌신을 보상 받고 싶었을까?
잘나가는 남편에 비해 자신은 보잘 것 없다고 느껴 떠날 것을 두려워해서일까?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이런 말들은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본전을 까먹는 말이다.
고마운 마음이 들다가도 그런 소리를 듣는 순간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갚아야 할 무거운 빚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의 행동을 제한하고 일일이 개입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두려움이 야기한 그런 행동은 많은 경우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너와 나 사이에는 경계가 있고
상대가 허락하지 않는 한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경계엔 꽃이 핀다’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아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그렇게 남편을 손아귀에 움켜쥔다 해도
그 결과, 남편은 자발성과 생명력을 점점 잃을 테고
옹색해지고 피폐해져 가는 남편을 소유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꽃이 탐이나 꺾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꽃은 금방 시들 테니까.

그런데 왜 그 남편은 그토록 병이 깊어지도록 아내를 돌봐주지 않았을까?
아내의 불안을 읽고 집착이 녹을 수 있도록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을까?

문득 관계에 대해 묘파한 칼릴 지브란의 시가 생각난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속박되지는 마라
차라리 그대들의 영혼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 마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 빵만을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줄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마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느니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나무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에선 자랄 수 없느니”


 
 
윤병우
화가.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2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왔다. 4대강 답사를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탈핵, 송전탑, 비정규직, 정신대 할머니 등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을 다니며 느낀 것과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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