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길벗한의사모임 대표 이승현 한의사

지난 겨울 ‘함께살자 농성촌’을 취재차 방문했다가 수줍게 천막을 열고 들어서는 두 명의 청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안녕하세요, 길벗한의사모임에서 진료를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용산참사 유가족들에게 복사해 온 문진표를 나눠주며 식사는 제때 하는지, 잠은 잘 자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물었다.

그 후 제주 강정마을 평화센터나 부평 콜트콜텍 농성장 같은 곳에서 한약 봉지가 들어있는 상자를 볼 때마다 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길 위의 사람들에게 벗이 되고 싶었던 걸까. 길벗한의사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는 한의사 이승현 씨를 서울역 부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 길벗한의사모임 대표 이승현 한의사 ⓒ한수진 기자

세상일에 마음 쓴 한의학과 학생모임이
소외된 사람들 찾아가는 한의사모임으로

면 티셔츠에 청바지, 검은색 뿔테안경, 순박한 인상. 이승현 씨에게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진맥을 짚는 근엄한 허준 선생의 모습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그가 먼저 “식사는 거르지 않고 잘 하세요?” 하고 묻는 바람에 직업병을 들키지 않았다면, 그가 한의사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 말끝마다 이어지는 “하하하” 웃음소리도 그동안 봐왔던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의사들을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그게 부담스러워요. 직장에서 하루 종일 동료 직원이나 환자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일하다보면 스스로 권위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연세가 많은 분들도 저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니 제 또래에서는 받기 힘든 대접을 받고 있는 거죠. 물론 제 나이가 어리다보니 진료를 할 때에는 선생님의 권위를 적당히 이용하는 게 편하기도 해요. 하하하. 나이가 어리다고 처방을 신뢰하지 않는 환자들이 가끔 있거든요. 하하하.”

이승현 씨가 길벗한의사모임의 회원이 된 것은 약 10년 전의 일이다. 본래 길벗한의사모임은 대학생 동아리에서 시작됐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있는 여러 대학의 한의학과 학생들이 모여 길벗학생모임을 만들었고, 그들이 졸업하면서 자연스레 한의사모임이 생겼다. 이승현 씨도 대학 생활의 절반 이상을 길벗학생모임과 함께 하다 길벗한의사가 됐다.

“처음에는 ‘민중의료 실현을 위한 동의사상 연구회’였던가,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고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는 활동을 주로 했는데, 이걸 계속 반복하다보니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직접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거죠. 그렇다고 정당 활동을 하거나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어요. 그때는 이미 학생운동이 죽어가고 있는 게 보이기도 했고요.”

그가 말하는 ‘직접적인 일’이란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을 뜻했다. 처음에는 누구를 만나야할지 몰라 무작정 공단에 찾아가 노조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대구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는 선후배들과 미군기지 이전사업으로 정부와 주민 사이 갈등이 컸던 평택 대추리까지 찾아가 진료했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있다고 했다.

“대추초등학교가 침탈되던 즈음이었어요. 경찰이 대추리를 완전히 봉쇄한 상황이라 평택시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몇 번이나 검문을 받아야 했죠. 검문소에 학생증을 맡기면 그 다음 검문 때에는 주민등록증을 맡기면서 ‘대구에서 왔으니 봐 달라’, ‘우리 나쁜 학생들 아니다’, ‘곧 나올거다’ 하며 사정을 하고 겨우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만났어요. 선배들이 진료를 하는 동안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들의 패배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깊은지 마음으로 전해졌어요. 국가권력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거예요.”

▲ 길벗한의사모임 회원들과 진료를 받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사진 제공 / 길벗한의사모임)

그저 돕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하고 싶어서

이승현 씨는 “길벗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추리에서의 경험은 그의 시선을 쌍용으로, 강정으로, 한진으로, 밀양으로 이끌었다. 요즘에는 매주 1회 콜트콜텍 농성장을 방문해 노동자들의 전담 한의사를 자처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침을 맞는다고 아픈 곳이 치료되지는 않아요.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맞아야 치료가 되죠. 하지만 직장 때문에 매일 찾아갈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가서 아픈 곳이 있는지 물어보고, 침도 놔드리는 거예요. 요즘에는 콜트콜텍 농성장을 찾아갈 때 진료를 보러 가는 마음보다 연대하러 간다는 마음이 더 커요.”

지난 2월 1일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농성하던 공장에서 쫓겨나왔던 날에도 이승현 씨는 진료를 마치고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가 부상자를 돌보려고 경찰과 실랑이 끝에 공장에 들어갔을 때에 공장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오늘 밤 공장을 지켜도 짧으면 내일, 길면 모레에 다시 쫓겨날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토록 일하고 싶었던 공장 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사진으로나마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승현 씨는 사진 촬영을 위한 조명을 들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짠해졌다고 했다.

“사실 진료만 생각하면 돈을 모아서 그분들에게 진료비를 지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거예요. 농성장을 찾아다니면 몸도 피곤하고 교통비도 들고, 부산 한진이나 제주 강정에 찾아가려면 그 비용이 엄청나잖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직접 찾아가는 것은 진료만이 아니라 연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이승현 씨는 가까운 미래에 전국 농성장 지도를 만들어 길벗한의사모임 회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뜻있는 한의사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는 살갗에 침을 놓는 ‘선생님’이 아닌 마음에 침을 놓는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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