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 임성무]

3월 30일까지 공모를 진행한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연재를 임성무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장의 글로 시작합니다. ―편집자

나는 요즘 교회에 나가는 일이 즐겁지 않다. 신심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날마다 <가톨릭신문>을 보거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보면서 교회 소식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최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강우일 주교님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기도문을 널리 퍼트렸다. 공지영 작가의 연재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아침마다 읽고 있으며, 페이스북에 올라온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묵상한다. 그리고 군대 간 아들에게 쓰는 편지 끝에 성경 말씀을 한 구절씩 써 보낸다. 교실에서도 식사 때마다 성호를 긋는다. 물론 정평위 활동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도 본당에 가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조용하게 미사를 드리고 나서 여러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지만 인사로 그친다. 본당 교육위원장으로 사목회의에 나가지만 뭔가 흔쾌하지 않다. 왜 그렇지? 내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은 건가? 자주 내가 문제가 많은 거라 생각할 만큼 나도 잘 모르겠다.

영성체가 없다면 천주교는 어떻게 될까

정평위 활동을 하면 5~60명만 모여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2천명이 모이는 미사에서는 그만큼 즐겁지 않을까? 교구 전체에서 백 명을 모으려고 얼마나 많은 애를 쓰는지 주님은 아시겠지만, 왜 주님은 우리 본당에 주일마다 저절로 모이는 2천명 중에서 백 명만 모아서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하게 하시지 않을까? 우스운 이야기로 혹시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는데, 에너지 절약이나 저염식 식단을 강조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굳이 우리 본당이 빛이나 소금이 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시는 걸까? 아니면 밤도 낮처럼 밝은 세상이어서 우리가 어둠을 찾지 못하거나 온갖 냉장고들이 많아서 음식이 썩지 않게 되어 소금이 더 필요하지 않은 걸까?

며칠 전 정평위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생각을 말했다. 만약 가톨릭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아니거나 영성체가 없다면 아마도 신자 수는 급격히 줄 것이다. 개신교회의 경우는 예배에서 목사님들의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설교가 마음에 안 들면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옮겨버리거나, 아예 마음 맞는 신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목사님을 청빙하면 그만이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일이 제도적으로 예방되어 있어서 그렇지 만약 신부님들의 강론만 두고 본다면 나부터 냉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영성체의 은총 덕분에 교회가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상봉 기자

세상은 요지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거나 실제 실행에 옮기고, 세계 속에서 10위권의 경제대국임에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자녀들은 경쟁교육에 죽을 지경이고, 뭐 금방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하지는 않을 테니 신앙생활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을 얻은 뒤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주일학교에 나오는 학생 신자를 위해 뭐라도 재미있게 해서 붙잡아 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청년들과 젊은 어른들은 비정규직이 굳어지는 세상에서 그나마 잡은 밥줄을 놓지 않기 위해 고통을 겪고 있으니 주일 미사를 드릴 여유가 없다. 여유가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신부님들의 강론을 통해서도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거나 말씀의 위로를 받은 기억이 많지 않다. 혹시 아직은 신자 수가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부님들은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보지 않으시거나, 보시더라도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니 잊고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개신교 사이비 종파의 논리를 갖고 게시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욕하고 나니 갑자기 고해해야 하나 싶다.

4월 10일 공지영 작가의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미카엘 수사님이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다가 경찰에 연행된 것을 이유로 중징계를 통보받은 뒤에 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깊이 공감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역설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교회, 낙태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왜 젊은 엄마들이 뱃속에 든 자신의 아이를 죽일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않는 교회, 수백명의 인명을 살상하려는 강대국의 무기 판매에 아무 경고도 하지 못하는 교회! 이혼은 죄라고 하면서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불행하게 사는지 모른 척하는 교회! 동성애가 무슨 취향인 줄 아는 교회! 그 교회가 나를, 여자들과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수도원의 형제들이 노동한 대가인 그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수사들과 같은 수위로 처벌하려 하는군. 부자가 재산을 자랑할 때 약탈과 착취가 묵인되고, 군 지휘관이 승전보를 알릴 때 대량 학살이 묵인되고, 고관대작이 권력을 뽐낼 때 폭력이 묵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것들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 부류 속에 있음을 의심하라! 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

안젤로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고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미카엘이 내게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내가 여기 더 머무를 이유가 있는 걸까?””

나도 가끔 ‘내가 여기 더 머무를 이유가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본당사목 간부를 맡을 이유가 있을까? 내가 본당을 위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교무금을 차라리 다른 어려운 곳에 내는 게 옳지 않을까? 토요일이나 주일을 이용해서 식구들과 여행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나처럼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데, 본당을 찾는 일은 내키지 않는 수많은 신자들을 위해 본당은 어떤 고민을 하고, 교구는 어떤 분석과 연구를 하고 대안을 내놓고 있을까?

우리 본당은 신자수가 5천명이 넘지만 절반가량이 주일 미사에 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왜 그럴까? 본당에서는 절반만 와도 충분하다고 여기거나 본래 사람들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이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럼에도 내가 ‘냉담’하지 않는 이유

교구에서 차라리 본당을 여러 유형으로 세우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다. 신부님들에 대한 신자들의 중간평가를 도입하자고 할까? 서울대교구는 본당 주임을 맡으셔도 될 나이에 아직도 보좌로 계신 신부님들도 많다는데, 특수사목 본당을 세우게 해서 냉담자들의 20%라도 회두시키게 하면 되지 않을까? 다양한 사목방향을 가진 본당을 세우고 신자들이 본당을 선택하게 하면 가톨릭교회는 무너질까?

ⓒ한수진 기자

신자들에게는 세상의 고통을 견뎌내고 예수님처럼 살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본당 신부님들의 세상과 아무 상관없는 먼 우주 어느 행성의 이야기로 들리는 4차원적인 강론을 듣는 게 어쩌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신자들은 본당에서 마주치는 신자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거나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면서 참 예수, 평화는 생각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 교구나 본당은 신자들이 권력과 맘몬을 쫓는 경쟁이라는 십자가만큼 힘든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부활, 평화, 행복을 꿈꾸며 살도록 해 주면 안 될까? 신자들이 본당이나 교구를 덜 걱정하도록 해주면 안 될까? 적어도 신부님들이 앞장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힘들게 살아가는 신자들과 교회가 속한 마을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주고, 위로해주시는 강론을 아주 가끔이라도 하시면 안 될까?

나는 결코 냉담하지 않으려고 한다. 본당이 나의 십자가일지라도 신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당의 부활을 믿으며 참고 꾸역꾸역 더 열심히 다녀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나 결심은 그래도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이 있고, 교구 한 가운데에서 전 존재를 걸고 예수살이 하시는 예수님의 비틀거리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답답한 신자들은 십자가를 같이 지거나 거들어 드리지 못하더라도, 느리지만 뒤따라가려는 것이다.

참, 공지영 작가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미카엘 수사님이 수도원을 떠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신부님, 이번 주일에는 모든 본당 신자들이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봉헌하게 해 주세요. 제발 남과 북이 전쟁하지 않게 해 주세요.

임성무 (도미니코,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장,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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