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우의 그림 에세이]

 

최근 외손주를 보았다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딸의 가족이 방문했다가 돌아가면 내내 손주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나?
남의 얘기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당해 보니 그 심정이 절실히 느껴진다고 한다.
누구나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는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어림짐작이나 할 뿐.

내가 고민의 당사자일 때는 답이 안 보여 헤매는데
막상 남의 고민을 들어 보면 문제의 핵심과 맥락이 읽히면서 답이 뻔히 보이기 마련이다.
자신의 문제는 객관화시키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괴팍한 성격의 직장 상사나 배우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면
해결책은 떠나거나, 적응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말이야 쉽지
생계가 달린 직장을 떠나는 것도, 배우자와 헤어지는 것도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기는 모두 어려운 문제다.

떠나자니 걸리는 게 많고, 받아들이자니 괴로워
다른 대안을 모색하려 하나 쉽지 않다.
고민을 상담한다 해도 고작 상대를 가해자, 자신을 피해자로 상정하고
그 부당한 처사와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하소연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래봤자 가려운 데 잠시 긁은 격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얻지 못한다.

오래 전 나도 그런 문제의 굴레에 갇혀 꼼짝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어떤 결정을 선뜻 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떠나거나, 적응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면
쓸데없이 오랜 시간을 고민하느라 에너지를 소진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

그 힘들었던 시절
마치 고장난 레코드처럼 똑같은 레퍼토리의 내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어떤 판단이나 권유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다.
심리상담의 기본이 내담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던데
그 친구는 상담가의 자질이 충분했다고나 할까?
사실 남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덕분에 그 시절을 시난고난하면서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친구와는 그 후 이사를 하면서 점점 소원해지다 연락이 끊어졌는데
몇 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반가워. 내가 예전에 어려운 위기를 잘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다 네 덕분인 것 같아.
그런데 매번 내 지겨운 얘기를 어쩌면 그렇게 묵묵히 들어줬니?“
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정으로 전하려 애쓰며 물어보았다.

“아, 그때? 별 거 아냐. 그냥 내내 딴생각하고 있었거든.”
 

 
윤병우
화가.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2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왔다. 4대강 답사를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탈핵, 송전탑, 비정규직, 정신대 할머니 등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을 다니며 느낀 것과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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