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경상도 산골마을에 귀촌해 사는 선배를 찾아 갔다. 이른바 갑상선 수술을 해서 목에 금(절개선 흉터)이 나 있는 여자들의 모임인 ‘목 · 금 · 녀’ 회동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세간의 우스갯소리에 의하면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은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하고 살아 그런 병이 생기는 거라 했다. 본인이 바로 그런 경우라며 몇 년 전 동병상련의 도원결의를 맺은 세 여자가 해마다 두어 차례 모인 게 수년째다.

역에 마중 나온 후배는 몇 년 전 그 선배의 소개로 만나 목금녀 회원이 된 여인으로 우리가 모일라치면 으레 기사 노릇을 자임하곤 했다. 차로 1시간 남짓 이동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아직 소식 감감인 온갖 꽃들이 만개해 있어 상춘객도 아니면서 은근히 들뜨는 기분이었다. 가는 도중에 선배 집에 전화를 하니 텃밭에서 뽑은 봄 푸성귀가 풍성하니 삼겹살과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해서 면소재지 마트에 들러 고기도 두어 근 끊고 막걸리도 몇 통 샀다.

도시에서 사업체를 꾸려온 후배는 운전 중에 자신도 머지않아 귀촌할 생각이라며 얼마 전 나름 노후대책의 일환으로 사들인 시골 땅에 만병통치 약재라는 삼채를 심어 돈도 벌고 자신과 주변의 건강도 챙기겠다는 야무진 꿈을 얘기했다. 이혼 후 혼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온 씩씩한 후배지만 저간의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까도녀’(까칠한 도시 여자)적 이미지의 그녀가 귀촌을 계획하게 된 현실적 동기일랑 아랑곳없이, 마치 그 연령대 중년층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법한 자연회귀적 욕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되어 새삼 동지애가 일었다.

요즘 예전 같지 않은 건강때문인지 반생태적 도시생활에 부쩍 염증을 내고 있던 나는 그런 이야기들에 귀가 솔깃해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선배의 외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서부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마저 꽤나 정답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후배와 장 봐온 것을 나눠 들고 오두막 사립문을 들어서니 봄볕에 그을린 건강한 낯빛의 선배가 손님 왔다고 짖어대는 강아지들에 둘러싸여 봄나물이 그득한 소쿠리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뭘 그렇게 많이 사 들고 와. 요즘 온 마당이 찬간인데!”

ⓒ박홍기

은혜로 시작된 기적 같은 하루

평소 좀 외로워 봬 마음이 쓰이는 그녀지만 때로 이렇게 은거하는 현자처럼 여유롭게 다가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 그녀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온 적이 있는데, 그즈음 그녀는 자기 삶에 대한 좌절감이 극에 달해있던 시점이었다. 그 메일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형제의 빚을 떠맡아 빈털터리가 되어 오랜 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해 살던 그녀에게 가족이라곤 강아지 세 마리뿐이다. 이들을 데리고 십년 전 연고도 없는 산골 생활을 시작한 그녀에게 바깥세상과 소통을 이어주는 것은 인터넷이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아침 일어나니 컴퓨터가 이유를 알 수 없게 작동이 되지 않고, 강아지 한 마리가 뭘 잘못 먹었는지 하루 종일 토한다. 워낙 빠듯한 살림에다 외진 곳이라 컴퓨터 수리공을 부르는 일도, 동물병원에 가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안고 동네 교회에 갔다. 예배 중에 계속 생각했다. 이것도 주님의 뜻일까?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얼까? 이런 사소하고 귀찮은 일로도 주님께 기도하고 매달려도 되는 걸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한 문제로 종일 속을 끓이다가 밤이 되자 에라 모르겠다, 주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시겠지, 하며 잠자리에 든다.

희망에 불과했을 텐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정말 그랬다! 강아지도 더 이상 토하지 않고 컴퓨터도 잘 작동되었다.’

그녀는 감격해 하며 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뜨거운 은혜로 기적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선배는 종종 그런 식의 작은 기적들을 ‘간증’하며 내가 지난 몇 년 모종의 난치병을 앓으며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한번 씩 내 마음의 등짝을 죽비처럼 내리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도 했다.

말 안 해도 알아주는 당신, 참 고맙다

그러한 목금녀 동지의 또 한 사람으로 미국서 사는 대학 선배가 있다. 재작년 여름인가 그 선배가 오랜만에 귀국했다.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공동의 지인들이 모여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후 그림 그리는 후배의 스튜디오에서 맥주 한잔들을 더 하며 분위기는 흥겹게 무르익었다.

컨디션이 컨디션인지라 평소 즐기던 술을 애써 참으며 혼자 말똥말똥해 있는 나를 눈여겨보던 선배가 곁으로 와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얘, 너 지금 잘 넘기고 건강해져서 오래 살아야 해! 너 잘못 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진짜야. 그러니, 알아서 해, 응?” 약간 혀가 풀린 음성으로 협박하듯 다그치는 선배의 눈빛에 취기와 함께 물기가 어른거렸다.

30년 세월을 자매처럼 지내온 그 선배가 그 말을 했을 때, 그것이 그녀의 가감 없는 진심임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나는 뭔가 잘못된 사람인 것이다. “그래, 선배. 알았어. 선배나 건강관리 잘 해.” 나는 심상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뭉클한 감동과 함께, 알지 못할 곳에서 갑자기 기운이 솟구치는 듯했다. 혈연관계도 가족도 아닌 사람이, 그 먼 곳에 떨어져 살면서 나에게 그토록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얘기가 아닌가. 세상에 어떤 한 존재라도 이렇듯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나는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거기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파란만장하고 신산한 세월을 견뎌온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경상도 목금녀들을 만나러 갔을 때 사실 나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고, 또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몸의 피로함을 감수할 만한 어떤 가치에 대한 믿음을 일깨운다. 세상 살면서 가슴에 쌓인 것을 다 말하지 못하지만 일일이 말 안 해도 서로 그 사정을 알아줄만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구자명 (임마꿀라타)
심리학을 전공했으나 소설 쓰기가 주업이고 이따금 부업으로 번역도 한다. 최근에는 동료 문인들과 함께 ‘문학적으로 자기 삶 돌아보기’를 위한 미니자서전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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