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여경]

고원을 품은 땅, 유목민, 언덕 위의 룽타. 이것이 떠나기 전 내가 티베트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다. 그러나 가서 만난 티베트는 노마드의 땅이기 이전에 순수하고 깊은 믿음의 땅이었다. 중국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광활한 초원에서의 고독 때문인지 티베트 사람들에게 종교는 아주 가까이, 그리고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티베트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무렵 숙소를 나섰을 때 푸른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흙냄새와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는 사원 둘레에 줄지어 선 마니차였다. 마니차는 안에 불교 경전이 들어있는 원통으로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아마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도 공덕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 테다. 때문에 티베트 어느 곳에서든 마니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원을 둘러싼 담벼락은 물론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휴대용 마니차부터 여러 사람이 함께 돌려야 하는 커다란 마니차, 물레방아로 돌아가는 마니차, 태양열로 돌아가는 마니차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이들 생활 곳곳에는 생필품처럼 종교적 물건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경

해가 미처 뜨기도 전인데 사원 둘레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염불을 외우며 마니차를 돌리고 있었다. 그들이 돌리고 있는 마니차는 이미 닳고 닳아 색이 바래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손때가 가득 묻은 손잡이를 만지면 매끈해진 표면으로부터 긴 시간동안 스쳐간 수많은 손길들이, 그리고 그 손에 담긴 염원들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니차를 돌리고 가기 때문에 가끔 사람 없이도 돌아가고 있는 마니차를 볼 수 있다. 나란히 줄지어선 마니차들의 빈 회전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게 티베트인들의 시간도 흘러왔겠지. 함께 마니차를 돌리는 걸음으로, 그들의 삶과 믿음을 앗아가려는 이들로부터 그것들을 지키며 지금까지 살아왔겠지 하는 생각에 망연해지고 겸허해지는 것이다.

마니차를 돌리는 긴긴 걸음도 충분치 않은 것인지 많은 이들이 오체투지를 한다. 오체투지는 말 그대로 오체를 땅에 던지는 것, 걸음마다 온몸을 납작하게 바닥에 엎드리며 나아가는 일이다. 사제들이 수품 때 바닥에 엎드리는 것처럼 불ㆍ법ㆍ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겠다는 완전한 투신의 약속이다.

인상적인 것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오체투지는 수품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남녀노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새벽녘 어둠 속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청년, 쌀포대를 입고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써가며 절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도,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고 가는 고속도로에서도 오체투지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무릎과 손바닥에 보호대를 차고서 몇날며칠을 바닥에 절을 하며 걸어간다.

ⓒ현선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는 티베트 사람들의 오체투지에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하도록 이끄는 것일까? 두려움일까, 이기심일까? 그러나 보면 볼 수록 벌을 두려워하거나 복을 기대하는 차원의 행위 같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언덕을 걷다가 나란히 앉아서 쉬고 있는 할머니 세 분을 만났다. 오래된 친구사이처럼 보이는 세 사람이 참 정겹게 보여 “따시뗄레” 하고 인사하며 곁에 앉았다. 얼마간 그렇게 그분들이 바라보고 있는 언덕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며 함께 앉아 있다가 작별인사로 작은 선물을 건네 드렸다. 그 가운데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도 있었고, 사진을 본 그분들의 얼굴은 반가움과 놀라움, 감격으로 가득 차올랐다. 사진을 받아든 할머니는 성스럽고 소중한 것에 하는 것과 같이 이마에 살짝 갖다대고는 목도리 속에 고이 넣어 간직하셨다. 그리곤 고맙다는 인사와 축복의 손짓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충분치 않다는 듯, 거듭해서.

그렇게 헤어져 길을 계속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가 되어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낡고 닳았을 몸을 이끌고 그분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들, 당신들을 찍은 사진은 필요 없다며 돌려주던 이들, 더 이상 욕심도 욕망도 없던 할머니들이 그렇게 오체투지를 하는 것을 나는 절대 두려움이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낡고 늙은 웃음과 소망과 간절함은 그런 것들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순수하고 깊은 믿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여경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이 왜 끝없이 불경을 외우고 마니차를 돌리며 오체투지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습관일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그것들이 너무 순진한 행동이거나 의미 없는 고행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나는 이제 그런 바보조차 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무 많이 알아버려서, 혹은 다 알고 있다는 오만에 의심을 키우고, 믿음에서 순수함이 사라지고, 결국 믿음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적 또한 사라지게 된 게 아닐까? 만약 기적이 일어난다면 이 사람들에게 내리겠구나 싶었다. 행여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 자체가 이미 나에겐 소중한 기적이었다.

고원을 닮아 순수하고 단단한 티베트 사람들, 그들과 만나는 짧은 시간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 나에게 작은 기적이 찾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직도 이렇게 천진하게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위안, 그래도 여전히 이 땅에 아름답고 순수한 한 귀퉁이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로에 기대어 더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갓만 같다. 조금은 바보 같은 믿음들과, 그런 믿음으로 가득 찬 이들의 일상이 영원할 수 있기를, 그리고 완전한 자유가 기적처럼 이들에게 안기어지기를 나도 바보처럼 기도해본다.

ⓒ여경

 
 

여경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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