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사도 5, 12-16; 묵시 1, 9-11. 12-13. 17-19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가 믿음을 고백합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어떤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 우리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그들과 함께 하신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성찬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그러니까 일주일 후,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토마스도 함께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이신 그분의 삶을 배워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임의로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 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지만,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다시 모였고, 그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예수님이 먼저 실천하셨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이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사람을 모두 고쳐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던 죄의 용서를 실천하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병든 사람은 모두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게르만족이라 불리던 야만인들이 대거 유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습니다. 옛날 로마제국의 경계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한 틈을 타서 제국의 영토인 유럽으로 몰려들어와 정착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서술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유럽에 정착한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름니다. 그들은 그들의 족장(族長)이 명령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오늘의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가 정해주는 보속을 행하게 하여, 자기 책임을 다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대부분이 문맹이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 책임감도 느끼지 않던 사람들을 위해 도입된 성사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 잘못에 대해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할 위험이 있습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더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살지 않고, 유대교 혹은 우리의 관행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의 임의에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아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과 성령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을 배워 성령이 일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주님’ 혹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배웁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 따라 섬기는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신앙인의 숨결로 살아 있어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예수님입니다. 현재 우리의 용서와 사랑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이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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