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일기]

두 시부터 판공성사 시작이라며 친구 신부는 20분 전에 나를 성당 앞에 내려주었다. 성당은 텅 비어있었다. 베트남 수녀 한 명만 오르간 앞에 앉아 어두운 성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판공성사 전에 있을 참회예절 성가 연습인가 보다. 수녀가 창문 너머로 내 얼굴을 보았다. 베트남 억양이 섞인 크마애로 인사를 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나와 고백소로 안내한다. 제의방에 임시로 꾸며놓은 고백소에 들었다.

선풍기 밑에 앉아 땀으로 축축한 셔츠 등짝을 말린다. '먹고 사는데 바쁜 사람들이 낮에 고백성사 보러 올 수 있을까?' 생각 하다가 꼼뽕짬 교구장 안토니 주교도 오토바이로 이 더위 속을 서너 시간이나 달려와 판공성사를 도울 거라는 친구 말을 떠올렸다. 기다렸다 주교에게 인사를 하는 게 예의다 싶어 제의방에 앉아 기다린다. 제의실 벽에는 복사용으로 보이는 작고 귀여운 형광색 허리끈들이 십자가 목걸이와 함께 걸려있다. 조금 전 창문 너머로 본 제대 뒤 십자고상에도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들과 네온등 장식이 있었다. 베트남 신자들은 신심을 이렇게 드러낸다.

냑 르엉 성당은 베트남에 맞닿은 꼼뽕짬 교구 소속이다. 교구 내에서도 가장 큰 베트남계 성당. 게다가 본당 주임까지 베트남계 크마애 신부이니 베트남의 어느 성당인 줄 착각할 만큼 그들만의 색이 강했다. 오르간 소리가 성당 창문을 넘어 벽을 타고 제의방으로 들어온다. 잠이 몰려왔다. 깊은 잠을 지나야 영혼의 문이 열리는가. 졸다가 주교가 들이닥치면 예의가 아니고, 이러다 고백성사를 듣다가도 졸겠다 싶었다. 제의방을 나와 본당 청년과 함께 커피를 사러 간다.

▲ 냑르엉 성당 복사단. 2013년 3월. 캄보디아, 냑 르엉 ⓒ김태진
성당을 나서니 오후 두 시의 햇살은 양철 지붕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고 티셔츠 위로 드러난 내 목덜미를 파고든다. 청년은 나를 성당 앞 골목으로 안내하면서 연신 뒤돌아 “여기 커피 집 누나도 우리 성당 성가대원이예요”하고 자랑 섞인 이야기를 한다. 컴컴한 커피 집 안쪽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 두 개가 철 지난 영화를 보여준다. 의자들은 마치 바다를 향해 길게 누워 있는 해변의 의자들처럼 모두 한 방향으로 모니터를 향해 있다. 서로에게 지친 이들, 사람 너머 그 무언가를 찾는 이들을 위한 자리였다.

사내 몇몇이 웃통을 벗은 채로 의자에 길게 누워 있다. 담배 연기 가득한 그늘 속에서 바깥세상을 잊게 만드는 나른한 안식이 발목을 휘감는다. 청년이 베트남 말로 커피를 시키는가 싶더니 아가씨에게 내가 고백성사 들으러 온 신부라고 일러준 모양이다. 커피를 준비하던 그녀가 나를 다시 살짝 올려보다가 눈이 마주치니 부끄럽게 웃는다. 빠른 손놀림으로 투명 플라스틱 컵에 잘게 부순 얼음을 가득 담고 그 위로 흰 설탕을 한 수저 얹고 미리 내려놓은 진한 커피를 붓는다. 검은 커피가 얼음을 녹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컵 밑바닥부터 다시 차오르는 모양을 물끄러미 본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도 무언가가 올라왔다.

성주간 동안 신학교에는 강의가 없다. 그 틈을 타 친구 신부가 있는 꼼뽕짬 교구, 그중 가장 외진 쩜락 성당에 왔다. 성삼일 피정을 하며 예수님 가까이 있고 싶었다. 지난 몇 달간 신학교, 수녀원, 성당을 자전거로 오가며 강의, 번역, 영적 지도, 미사를 반복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캄보디아 미션에 한국 관구장 대리로 있던 선배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 또 휘청했다. 시끄러운 마음자리를 들여다보길 고작 하루. 친구 신부는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나더러 냑르엉 성당 판공성사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두 시간 흙 길을 운전해 나를 여기 내려놓고 자기도 이웃 성당으로 판공성사를 보러 가 버렸다. 사실 나는 지난 주말 프놈뻔 교구 성당 두 군데서 이미 여섯 시간에 걸쳐 판공성사를 도와주었다. 이 무더위에 장백의까지 뒤집어쓰고 남의 죄를 듣고 있으니, 온몸에 땀띠가 났다. 도망치듯 이 시골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신부 귀가 부족하다고 잡아끈다. 어찌 사제가 성사를 거부하겠나. 더구나 부활 전의 고백성사를.

시원하고 깨끗한 제의방 고백소는 주교에게 양보했다. 청소하고 의자 두 개를 놓아 임시 고백소로 마련한 창고에서 신자들을 기다린다. 성당 안에서는 공동 참회예절 성가 소리, 기도문 외는 소리, 본당 신부의 짧은 안내가 베트남 말로 들린다. 잠시 후 우르르 신자들이 쏟아져 나와 창고 문 앞으로 줄지어 선다. 한 사람씩 조심스레 들어온다. 벽에 붙은 예수 성심 사진을 보고서서 성호를 긋고 의자에 앉는다. 어떤 이들은 내가 성호도 채 긋기 전에 다짜고짜 베트남 말로 중얼중얼 죄를 읊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베트남 억양이 강한 크마애로 떠듬떠듬 “신부님 제가 크마애를 잘 못하는데 베트남 말로 고백성사를 해도 될까요?” 하고 조심스레 청한다.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미안하고, 마음마저 헤아리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난다. 이들과 예수님만 아는 그 내밀한 베트남 말 고백이 이어지면 난 하릴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눈을 뜨면 이들의 발이 보인다. 볕에 그을리고, 흙먼지가 묻은 발. 간혹 양말을 신은 발도 있고, 발목에 줄 장식이 있거나, 색을 칠한 발톱 등 젊은 아가씨들의 발도 보였다. 들리지 않는 죄 대신 발을 보고 이들의 삶을 가늠해 본다.

속삭임이 멈춘다. 고개를 들어 고백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고백을 듣던 신부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게 두렵고 어색한지, 이들의 합장한 두 손이 가늘게 떨린다. 나는 다른 수가 없기에 크마애로 묻는다. “고백 다 하셨나요?” 모두들 내 크마애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참 희한하지. 설움 받으며 얹혀사는 나라 말, 크마애. 눈으로는 못 읽어 까막눈이고, 입으로는 하고 싶은 말 속 시원히 못 해 답답 벙어리지만, 귀로는 귀신같이 말귀를 알아듣는다. 남의 나라 살이는 귀로 한다. 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눈을 맞춘다. 또박 또박 크마애로 성삼일, 부활 교리를 짧게 설명하고 보속을 준다. 한두 마디 하고 나선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확인도 한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하도 답답해 신자 한 명이 고백성사를 마치고 나갈 때 따라 일어섰다. 창고 문을 나서니 문밖에 두 줄로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움찔 놀라며 한발 물러선다. 웃으며 신자들에게 아주 천천히 이야기한다.

“부탁 하나 드릴게요. 혹시라도, 크마애를 할 줄 아시면 떠듬거려도 좋으니 크마애로 성사를 보세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여러분의 어려움을 듣고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어요.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어요. 저는 하느님께 귀를 빌려드리는 거예요. 저에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아픔과 허물을 들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

젊은이들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이 드신 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린다. 못 알아들은 눈치다. 그러자 사목 위원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 한 명이 통역을 한다. 어른들이 다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암 그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그 뒤 들어오는 사람들은 크마애로 고백을 보려고 애를 썼다. 나이 드신 분들까지 떠듬떠듬. 그러나 곧 내가 공연한 짓을 했음을 알았다. “신부님, 미사에 몇 번 빠졌습니다. 저녁 기도를 몇 번 궐했습니다. 바깥양반에게, 집사람에게, 애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웃들을 미워하고 욕했습니다...” 고백의 내용이 판박이처럼 같았다.

세 시간 판공성사를 마쳤다. 사람들이 다 가버린 창고 앞마당으로 나선다. 햇살은 한 풀 꺾였고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거린다. 이 사람들은 알았을까? 자신들이 입으로 무엇을 몇 번 어겼다는 판박이 고백을 하는 동안, 꾸밈없는 삶을 고스란히 가져와 예수께 보여 드리고 있었음을. 그래서 편지나 전화로는 성사를 볼 수가 없음을.

안토니 주교와 본당 주임 폴 신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성당을 나섰다. 친구 신부는 나를 데려가려고 차를 대 놓고 한참을 기다린 듯 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친구 신부는 간만에 만난 반가움에 들떠 지난 두어 달 자신의 영적 체험을 조잘댄다. “음, 좋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잠으로 빠져든다.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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