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선교일기]

내가 이 칼럼에서 나의 볼리비아 교도소 사목에 관해 여러 차례 이야기 나누며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취급당하다 못해 아예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잊혀지고 마는 교도소 수감자들을 돕는 것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또는 어떻게 해서 감옥에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과는 상관없이, 내가 하는 일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감자들을 도와주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 뿐 아니라 내 삶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를 돕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이고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 나와 같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커다란 힘이라는 것도 믿는다.

▲ 면회를 기다리는 아니타의 가족들 ⓒ이윤주
선교의 소명으로 사는 것은 힘들 때도 많이 있지만, 우리가 돌보는 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소중한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자꾸만 고개를 내민다. 내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내가 과연 무언가를 하고 있긴 하는가’이다.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 정도면 내가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인가. 뭔가 더 해야 하지 않나. 이걸로 된건가…. 내가 만나고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을 돕고, 그 다음날엔 또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충분치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교도소에 갇혀 고생하는 이 모든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몇몇 사람을 돕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총기로 살해당한 내 친구 아니타,
범인으로 지목된 아들은 변호사 한 번 만나지 못하고 교도소로


이런 질문들은 내 친구 아니타와 그의 아들 호르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 볼리비아에 와서 언어를 공부하던 학교가 있었다. 아니타는 그 학교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잘 몰랐지만 내가 조금씩 말을 배워가며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차츰 가까워졌고 여러가지 관심사를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와 나는 2년 가까이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아니타와 그의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충격에 빠졌다. 아니타와 남편은 누군가에 의해서 총기로 살해당했으며 두 사람의 시신은 변두리 개천가에 버려졌다 발견되었다.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금새 TV와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한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수없는 추측과 소문이 나돌았다. 당연히 경찰은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며칠 후, 아무런 합당한 이유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경찰은 아니타의 아들 호르헤를 존속 살인 혐의로 체포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르헤는 결백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교도소에 있다.

▲ 폭동으로 일시 폐쇄된 산 안토니오 교도소 밖에서 면회를 기다리는 가족들 ⓒ이윤주

사법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볼리비아

이곳 볼리비아에는 사법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범죄가 발생하면 충분한 사후 조사나 법적 절차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찰은 현장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조사도 없이 바로 교도소로 넘기면 그만이고, 그렇게 억울하게 들어와 수 년간 경찰도 변호사도 만나보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사람이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를 밝히지도 않고 평생을 교도소에서 살게 한다는 뜻이다.

같이 일하는 평신도 선교사이자 변호사인 동료의 말을 들으니 수감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형을 선고받지 않은 상태로 교도소에 갇혀 있다고 한다. 아직 미결 상태로 형의 확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겠거니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교도소로 왔고, 그 후에는 아무런 절차를 밟을 기회도 없이 그저 막막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하루 한끼 밥을 사먹을 형편도 못되는 사람들이 변호사를 고용할 길은 당연히 없다. 밥도 주지 않고 몸을 누일 감방도 주지 않으면서 방값을 내게 하고, 의료혜택이 없어 수감자들이 죽어나가고, 변호사 한 번 만나지 못하고 수십 년을 갇혀 있는 이 곳 교도소에서 수감자들과 그 가족들은 빈번하게 시위를 벌이고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불이익은 고스란히 수감자들과 가족들에게 돌아온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순박한 시골 아낙인 넬리는 이웃집 땅문서를 훔쳐다 위조해서 팔았다는 이웃의 근거 없는 신고로 교도소에 들어온 지 몇 년째다. 감자 캐는 것 밖에 모르는 그녀는 “내 이름도 쓸 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문서를 알겠냐”며 울먹였다. 몇 년 째 변호사를 만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딸 대신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교도소에 잡혀온 것은 오히려 그 딸과 어머니였다. 경찰은 어머니가 범행을 알고도 방조했거나 딸을 내보내 성매매를 시켜왔을 것이라는 엉뚱한 말만 했다. 경찰조사는 물론 없었다. 억울한 어머니와 딸은 교도소 안에서 몸과 마음에 병이 깊이 들었다.

▲ 교도소 앞 거리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가족들 ⓒ이윤주
나는 이같이 많은 수감자들이 정말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죄 지은 사람,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힘없고 비참하게 내쳐진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과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시작되어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절망을 넘어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부당한 제도를 바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내가 교도소 안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맺어가는 관계들이 지금의 내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인지, 그리고 그 관계가 서로에게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는 이미 너무도 깊이 배우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아직도 충분치가 않다. 뭔가 부족하고 이것만으로는 안되지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라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억눌린자를 더욱 억누르는 이 부당한 제도를 바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적인 관계를 키워가는 것은 물론 큰 의미가 있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제도의 변화가 없다면 이 사람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고, 그 달라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과연 나는 절망하지 않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을 부당한 제도를 그만 못 본 척 하고, 그저 관계를 맺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선교지에 오기 전, 내가 그리던 선교라는 그림에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를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는 선교사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는 그 그림 안에 또 다른 선교사의 모습이 있다.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는 기업과 정부에 맞서 불의한 구조를 바로 잡고 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가장 앞줄에 서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제 나는 선교의 소명을 받은 우리가 그 두 가지 역할을 다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 그리스도안의 자매와 형제로 다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복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이윤주 수녀 (메리놀 수녀회, 볼리비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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