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부활 성야),루카 24, 1-12

우리는 오늘 촛불을 밝혀들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단죄하고, 제거하기로 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정치범으로 둔갑되어 십자가형의 언도를 받습니다. 인류역사에는 많은 생명이 부당하게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부조리한 현실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인류역사는 항상 강자와 승리자의 편입니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소개할 때도 그것이 어느 통치자 밑에서 이루어진 위업(偉業)인지는 역사가 말하지만, 그것을 위해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리며 죽어간 많은 이들의 한(恨)과 고통은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과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체포되고 총독의 협조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인류의 무모한 해악(害惡)과 살생(殺生) 너머에 하느님이 엄연히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어두운 우리의 현실을 넘어 하느님의 빛을 보고 살자는 오늘의 축일입니다. 갖가지 횡포가 있고 말살(抹殺)하고 싶은 악의(惡意)가 기성(氣盛)하는 우리의 역사 안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양 한 마리도 잃지 않고, 찾아서 거두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횡포와 미움과 말살은 인류가 역사 안에 만드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빛으로 그 어둠을 물리치신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인류는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신다는 모세의 깨달음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으로 인류는 구원 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신천으로 하느님이 어떤 사랑이신지를 보여 주셨고, 제자들도 당신을 따라 같은 실천을 하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역사 안에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한 마디를 더 합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류 안에 이미 자리 잡은 횡포와 미움과 말살의 어둠은 그분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제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산다고 말하면서도, 횡포와 미움과 말살의 어둠에서 쉽게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기보다는 하느님이 벌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더 쉽게 믿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느님을 상상하고 우리 자신도 이웃에게 인과응보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합니다. 우리는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군림하며 사람들로부터 봉사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빈 무덤을 발견한 여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고’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부질없는 헛소리로 생각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을 믿게 만드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만, 사람이 그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계시지 않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상태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행적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말씀과 행적을 따라 자기도 실천하겠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서(11장)가 전하는 라자로의 부활과 같이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읽어낸 제자들이 같은 실천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또 제자들의 실천 안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부활 축일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활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아무것이나 맹목적으로 믿는, 모자라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활 축일을 맞이한 우리가 할 일은 오늘 복음이 무덤에 갔다고 말하는 그 여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이 기억하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여 이 세상에 살아 계신 양식입니다.

오늘 복음의 천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가르치고 실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 안에 돋보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못나고 죄인이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읽어내고, 그것을 조금씩 실천하여, 인류역사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흘러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실천은 불안하고 실수도 많이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실천이 서툴러도 예수님의 실천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만큼 그분은 우리 가운데 부활하여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세례 갱신식을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여 인류역사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흘러들게 하겠다는 마음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횡포와 미움과 말살의 어둠이 사라지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역사 안에 빛으로 살아 계시게 하겠다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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