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요한 18,1 - 19,42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사람들이 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복음서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다르고, 각 공동체가 조명하고자 하는 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여 예수라는 사람이 되었고,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땅에서 다 이루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신 사실을 특별히 조명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사명을 다 한 예수님이 때가 되자,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로 개선하는 장엄한 행보로 수난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을 하셨다는 말로 이 수난사는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체포되는 장면에서도 그분의 당당하신 모습을 보도합니다. 군인들이 그분을 잡으러 접근하였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은 ‘나다’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군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체포되면서도 그 장면을 주도하는 당당한 주인공이십니다. 무장하고 그분을 잡으러온 군인들이 그분 앞에 오히려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이 또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는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여기서 능동적인 사람은 잡으러 온 군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십니다.

대사제인 한나스의 심문에서도 예수님은 의연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 보아라.’ 한나스는 전임 대사제이고, 당시 대사제인 가야파의 장인입니다. 예수님은 막강한 권력의 실세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십니다.

로마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르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부하들이 싸우고 죽이고 빼앗아서 옹립해 주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그분은 전혀 다른 질서를 지닌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천하를 호령하는 빌라도이지만, 그 진리를 모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셨고,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 나라의 기본질서가 되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에서 살려내고, 그에게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8,29).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이고, 예수님이 왕이신 것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 나라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거론하신 진리는 바로 이 용서하고 살리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으로 무장하여 강자로 군림하는 빌라도가 모르는 진리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기 일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하였다는 군중의 말에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예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엄밀히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다가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빌라도는 심문을 끝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라는 군중의 협박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은 이렇게 소신이 없습니다. 군중은 이유 없이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이성을 잃었습니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처형 당하셨고, 군중은 유대교 지도자의 선동으로 이성을 잃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황제의 백성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 어머니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으로 맺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도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리아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각별한 마음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유지(遺志)였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4,7). 그 여인과의 대화중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여기서 이 복음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은 성령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죽음 후에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라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미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령이 오시고, 동시에 신앙공동체가 발족하여 그들 안에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고, 그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명이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령이 오시고 교회가 출현하면서 예수님의 사명은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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