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묵상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묵상합니다. 십자가를 매고 해가 막 기울기 시작한 흙바람 이는 골고타 언덕길을 죽음보다 더 한 고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예수의 발걸음, 그리고 제자들마저 외면한 가운데 외롭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를 기억해야 하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식에 참여하고, 전례에서 수난 복음을 듣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과연 십자가의 길을 걷고 싶으셨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자연사(自然死) 하는 것도 못내 두려운 우리 인간에게, 더군다나 단순하게 총 한방에 맞이하는 고통 없는 죽음도 아닌, 참혹한 고통을 인내해야 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 가운데 단 한명이라도 그 길을 선뜻 가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요?

▲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 이콘)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당신에게 닥칠 고난의 잔을 피하려 하셨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게세마니에서 기도를 올리십니다. 함께 동행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이라고 토로하시며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리시어 당신에게 닥쳐올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가게 해 달라”(마르 14,35)고 기도하십니다. 이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사”(마르 14,36) 간청 드리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당신께 닥쳐올 고난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국 그 길을 가십니다.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몰골로 십자가를 진채 죽음의 계곡을 향하는 예수, 그런 예수를 남겨두고 슬슬 뒷걸음치는 제자들, 슬픔에 잠겨 눈물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여인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구경거리로만 여겨 무작정 따라나선 사람들, 그리고 채찍을 들고 예수를 재촉하는 병사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예수에게는 남겨진 것이 없었습니다. 흙먼지와 피땀으로 얼룩진 겉옷은 이미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 나눠 가졌습니다(루카 23,34 참조). 그분은 결국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활량한 골고타 언덕 높이 세워지셨습니다. 채찍과 형벌을 감수하며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은 예수의 사랑이 세상에 훤히 드러난 순간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훤히 자신을 모두 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평소 우리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또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소에서 마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내 탓이요’를 외치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남의 탓’이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또한 내가 잘 먹고 잘사는데 걸림돌이 아니라면, 이웃의 어려움에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신앙인이라 자처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이렇다 보니, 예수께서 공생활 가운데 보여주신 많은 일들은 그저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처럼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위 죽음도 2천 년전에 살다 간 예수라는 위인의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에게 예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십자가 아래 모여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인 예수를 주시하고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분처럼 살고자 결심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 분의 뜻은 저버린 채, 그저 우리가 필요한 것만 되뇌곤 합니다. 십자가 위에 계시는 그 분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만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벌거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허식과 이기심을 모두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그 분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셨던 예수께서도 주저하셨던 그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길을 혼자 걸으셨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도 혼자 매고 가셨지만, 우리의 십자가는 이웃들과 서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우리가 십자가의 길 예절에 참여하고 수난 복음을 듣는 이유는 바로 예수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부활의 기쁨을 그 분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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