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영화-정민아]

어김없이 4월 3일은 온다. 바람의 신이라는 영등할망이 봄을 제주로 불러오는 4월이 되면 제주민들은 슬프다.

<지슬>이라는 제주 출신 감독이 만든 4.3 항쟁을 흑백화면에 담은 영화가 개봉했다. 지난해에 완성된 이 독립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넷팻상을 비롯 네 개의 상을 수상했다. 올해 벽두부터 이 영화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세계 인디영화인들 최고의 꿈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 황금수레바퀴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명성을 얻고서 화제를 모아 국내 개봉을 했다.

▲ 사진출처/ 영화 <지슬> 홈페이지

<지슬>은 전국 개봉 이전에 제주도에서 2주 전 먼저 개봉했다. 그리고 첫날부터 전회 매진되었고, 이미 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터라 전국관객 3만 명이라는 감독 측의 목표는 달성 가능한 수치일 듯하다.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세 편이 나온 한국영화계 현실에서 3만은 처참한 실패인 듯이 들리지만, 독립영화가 2만 관객을 동원하면 성공이라고 자축하는 현실에서 3만 관객은 2억 5천으로 제작된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꿈꿀 수 있는 쉽지 않은 목표이기도 하다.

개봉 첫날부터 퐁당퐁당 상영이다. 이것이 마이너 배급사를 통해 상영되는 독립영화의 현실임을 알지만, 반드시 만들어졌어야 하는 영화를 앞에 두고 상업성 중심의 배급 환경이 아쉽다.

제주도 4.3 항쟁, 그리고 제사 형식으로 이루어진 영화 구성

1947년에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발생하고 이에 대한 경찰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3만 명의 양민이 희생당한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들이 자연스럽게 미군정경찰로 변신하면서 남로당의 미군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제주 항쟁은 반공극우단체와 경찰에 의해 ‘빨갱이 폭동’으로 규정되었다. 영화는 1948년 11월,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한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길에 올라 큰넓궤 동굴로 피신했던 마을사람들과 그들을 잡으러 다니는 군인 두 공동체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이 사건을 제사(祭祀)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소제목으로 분절하여 마지막 ‘학생부군신위’라고 쓰인 지방이 타 없어지며 이름 없이 죽어간 억울한 원혼들을 위로한다.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듯이, “영화로 제사를 지내자”가 영화가 그들에게 취하는 태도이다.

▲ 사진출처/ 영화 <지슬> 홈페이지

그 당시 사건을 팩트로써 재연하기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영화는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제사를 통한 씻김굿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완성된 영화는 수많은 상징과 시적 이미지로 풍성해져서, 스크린을 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별이 되었을 원혼들이 땅으로 내려와 후손인 우리와 접속하는 듯한 영적이고 초월적이며 신묘한 무드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제사에 동참하는 것 같은 특별한 영화적 경험을 창조해낸다.

군대 내에는 ‘빨갱이 폭도 소탕’을 입에 달고 다니며 약에 취해 미친개처럼 칼을 들고 날뛰는 김상병이 있는가 하면, 죄 없는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는 것보단 한 겨울에 발가벗겨 기합을 서는 것을 선택하는 내부의 양심 박일병이 공존한다. 오프닝 샷에서 제주로 내려온 군인들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바, 두 명의 군인은 제기가 어지럽게 나뒹구는 가운데 사람을 푹푹 쑤셔서 죽이는데 써먹던 칼을 쓱쓱 닦아 제상에 올려진 사과를 무심하게 썰어서 나눠먹는다. 그들 바로 뒤에는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시체가 아무렇게나 장 위에 올려져 있다.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자신의 비루한 삶의 지속을 위해서다

일상적인 유머와 제주 신화의 차용

동굴로 향하는 마을사람들 에피소드는 일상적인 유머로 가득하다. 그들이 작은 구덩이에 한데 엉겨 숨거나,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낮은 천장의 동굴 속에 옹기종기 둘러앉거나, 어두운 나무숲으로 나가 찬바람을 폐부 깊숙이 집어넣기 위해 나란히 자리를 하거나 하는 동안 쓸데 없는 일상사로 티격태격한다. 미군정하의 이 엄청난 수난을 알지 못한 채, 매일 하는 일상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들의 티격태격 웃기는 에피소드를 웃으면서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곧 죽을 것이고, 멀리서 관찰하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다투는 일이란 얼마나 소중한 일상사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온다. 웃기고도 슬픈 파토스!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잡혀온 순덕에게 지슬을 건네다 총을 맞는 박상병에게 지슬은 죽음이요, 다리가 아파 따라가지 못한 무동의 늙은 어머니가 아들 가족을 먹이기 위해 품에 안은 지슬은 동굴 사람들을 생존하게 하는 삶이다. 지슬은 삶과 죽음이며,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4.3의 원혼과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제주도 땅을 담은 화면 위로 하나로 접속한다.

▲ 사진출처/ 영화 <지슬> 홈페이지

일행에서 일탈해 군인들에게 잡혀 유린당하는 순덕의 벌거벗은 상체가 한라산 언덕 라인과 하나가 될 때, 나는 설문대할망을 떠올렸다. 너무나 키가 커서 한쪽 발은 바닷가에 한쪽 팔은 한라 봉우리에 걸치고 쉬었던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영화 전체의 관찰자가 되는 어린 군인 주정길이 포악한 살인귀 김상병을 가두는 장면에서도 설문대할망 설화가 생각났다. 오백 아들들을 먹이기 위해 거대한 가마솥에 죽을 쑤다가 빠져서 고기가 되었다는 설화. 군인 주정길 역할을 맡은 배우는 여성이고, 물그릇을 들고 김상병의 추악한 행위를 수발 들던 말없는 아이가 그의 최후를 관장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설화를 상징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읽혔다. 수호신은 말 없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그리고 위로한다. 영화는 역사를 신화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새롭게 역사를 읽는다.

로컬시네마와 영화적 성취

오멸 감독은 제주를 기반 삼아 활동하는 자파리연구소와 자파리필름 대표이다. 연극, 소리극, 전위극, 퍼포먼스, 샌드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전방위 예술가이고, <지슬>은 <어이그 저 귓 것>(2009), <뽕똘>(2011), <이어도>(2011)에 이은 네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 속 제주 말로 주고받는 대사는 자막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제주에서 활동하며 제주인들로 이루어진 예술 커뮤니티 안에서 작품을 하며 제주도 이야기를 하는 진정한 ‘로컬시네마’의 롤모델이다. 예정된 그의 차기작은 제주도 신화를 다룬다고 한다.

영화에는 한국화를 전공했다는 오멸 감독의 역량이 총동원된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구도를 계산한 정사진처럼 미학적으로 아름답다. 몇 차례의 롱테이크 씬은 작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이룬다. 군인이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학살하는, 단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진 시퀀스는 칼을 든 군인의 뒤를 가까이 따라가는 카메라 시선에서 슬로우모션으로 촬영하며, 현장 사운드를 몽땅 죽이고 숨소리만 작게 들리도록 한다. 난폭하고 처참한 그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은 몹시도 잔인한 일이어서, 감독은 어떤 초자연적인 기이한 환영의 순간인 것처럼 그려낸다. 정길일 수도 어떤 신(神)일 수도 있는 이 카메라 시선은 폭로가 아닌 위로를 위해 활용된다. “그래, 너희들도 살아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어.” 진짜 가해자는 바로 미군정과 해방정국의 위정자들이니까.

▲ 사진출처/ 영화 <지슬> 홈페이지

동굴 속 주민들의 대화를 따라가는 롱테이크 패닝 쇼트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영화의 백미다.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둥글게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들의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는 방식은 특별하다. 말하고 있는 한 사람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그 다음에 말하는 자로 팬 이동함으로써 영화는 동굴 속 주민 모두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 속 주인공이다. 이 장면에서 자연적 공간은 파괴된다. 영화는 대화 씬을 따라가는 전형적인 촬영술을 거부하는데, 건너편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바로 옆 자리에 있거나 바로 옆 사람이 금세 바뀌기도 한다. 자, ‘제사로서의 영화’라서 이 공간의 현실성이란 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체포되기 직전, 그들 소박한 삶에 대한 경축으로서의 수다 제의를 보고 있는 것이다.

4.3을 다룬 작품들

4.3을 다룬 작품들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자리에 영화 <지슬>이 있다. <지슬>은 대중문화가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의도다. 2008년 <워낭소리> 돌풍처럼 독립영화 불멸의 신화를 그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기적을 그린 이 영화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큰 화면으로 꼭 감상하시길 당부 드린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 것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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