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3월 하늘을 가만히 우러러보면 나는 김순덕 할머니가 생각난다. 김순덕 할머니는 192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3녀 중 둘째 딸로 출생했다. 그녀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 공장에서 일할 여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그 후 중국 상해에서 남경에 이르기까지 부대를 따라 이동하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몸도 허약해지자, 위안소를 이용하던 일본인 고위 장교에게 간청하여 끌려간 지 3년 만인 1940년 귀국했다.

 ⓒ박홍기
그러나 그는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서울 등지에서 남의 집 살이도 하고 장사도 하며 힘겹게 살았다. 다행히 한국 전쟁 중에 아내를 북한에 남겨두고 내려온 남자와 결혼해 그나마 행복하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0년 초, 심장마비로 숨진 남편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김순덕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2000년 3월 어느 날, 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자신들의 발자취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한국에 온 일본인 고등학생 10여 명과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김순덕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 먼 거리를 찾아온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지나온 일들을 전해주셨다. 두 나라의 근현대사를 나름대로 공부하고 온 학생들이었지만,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에 방안에는 내내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몇 번인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겪어온 고통을 회상하시던 할머니는, “너희들의 죄는 아니지만 일본정부가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일본 학생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할머니의 증언이 끝나자, 학생들은 자신들이 준비해 온 노래를 한 곡 들려드리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합창을 시작했다.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요?
사람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요?
그런 방랑이 멈출 때면
꽃으로 꽃으로 피어나고 싶어요.
울어보세요, 웃어보세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꽃을 피워요.

눈물은 흘러서 어디로 가나요?
사랑도 흘러서 어디로 가나요?
그런 방랑을 우리 안에
꽃으로 꽃으로 맞이하고 싶어요.
울어보세요, 웃어보세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꽃을 붙잡아요.

꽃은 꽃답게 웃을 수 있어요.
꽃은 꽃답게 울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이 자연의 노래이니
마음속에 마음속에 꽃을 피워요.

학생들의 합창이 끝나자마자, 자리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쳐나오며 외쳤다. “이것은 내 노래야, 이것은 바로 내 노래야”

할머니의 격정적인 절규를 듣는 순간, 학생들은 참았던 울음을 와락 터트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서 눈시울을 적시던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학생들 앞으로 갔다. 그리고 한 사람씩 손을 잡고 가슴으로 안아주며 다독였다. “울지 마,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 너희들은 잘못한 것이 없어” 하지만 할머니의 품에 안긴 일본인 학생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목이 메여 헛기침을 하거나, 울음 섞인 소리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김순덕 할머니는 2004년 뇌출혈로 쓰러져 치료를 받던 도중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자신을 ‘못다 핀 꽃 한 송이’라고 표현하셨다. 나눔의 집에서 미술치료를 받을 때도 ‘못다 핀 꽃’이란 제목의 그림을 그려 당신의 한을 드러내셨다.

나는 김순덕 할머니와 일본인 학생들의 만남을 옆에서 지켜보며 진정한 위로,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그들에게는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 없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도 없었다. 오직 진실 앞에 서로 손을 맞잡고 공감하는 소통의 장이 열려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의 품에 안겼던 학생들은 돌아가는 차안에서 몇 번이고 할머니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할머니도 내내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 바람이 차가운 강가에서.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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