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찬 성목요일]

공생활 3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모두 마치신 예수께서는 어느 허름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과월절 저녁식사를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여느 과월절 저녁 식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예수께는 제자들과 지상 여정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저녁식사입니다.

이날 저녁식사는 과월절을 맞이하는 제자들의 기쁨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예수님의 슬픔이 함께 녹아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듣는 우리의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기 까지 합니다.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이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바로 눈앞에 두고, 유언과도 같은 말씀과 행동을 남기시지만, 제자들에게는 모두 의아하고 이해 못할 것들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 전, 갑자기 예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이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무척 곤혹스러워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요한 13,6). 베드로의 물음입니다. 자신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예수의 발을 씻겨 드려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종노릇을 자처하시는 예수의 행동에 베드로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어 주신 다음, 자리에 앉아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체성사가 제정되는 순간이지요. 예수와 제자들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월절에 흔히 먹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쓰디 쓴 씀바귀나물이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제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몸’과 ‘피’가 됩니다.

교회가 오늘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발씻김 예식과 성체성사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발씻김 예식과 성체성사에는 ‘내어줌’과 ‘행함’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발씻김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제자들의 종노릇을 자처하시며, 당신의 모든 인간적 권위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이는 결국 ‘내어 놓으심’을 의미합니다. ‘내려놓음’과 ‘내어놓음’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루카 22,19-20 참조). 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피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발씻김과 성체성사는 ‘내어줌’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내어줌’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과 똑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씻김’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과 똑같이 ‘행하라’고 본을 보여 주시고(요한 13,15 참조), 최후의 만찬을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기억하여 내어줌을 ‘행하라’(루카 22,2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내어줌’과 ‘행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고난을 겪기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고대하셨습니다(루카 22,15 참조). 당신께서 공생활 동안 행하신 모든 말씀과 기적, 그리고 행동은 바로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과 행동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시고 행하신 것처럼 신앙인들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통으로 빚어낸 열매의 달콤함에 그 기반을 두어서는 않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앙은 이웃의 거친 발을 씻어주고,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놓는 행위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내어줌’에서 시작하여 ‘행함’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주님 만찬 성목요일을 거행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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