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하민]

“마야인들이 예측했던 2012년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애석하게도 여러분은 다음 학기부터 제 수업을 듣게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도서 목록을 첨부합니다.”

새해 첫날 교수님의 메일을 받고 나도 모르게 혼자 웃음이 터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이 되었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서 흘러가버린 시간을 쫓기에 바빠 주위 사람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아직은 찬바람이 불면 몸이 움츠러드는 날씨긴 하지만, 봄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비에 젖은 파리 풍경은 어느덧 싱그럽고, 풋풋하다.

 ▲빠리에 있는 룩상부흐 공원 (Jardin du Luxembourg). 기상이변으로 3월 중순까지 눈에 덮혔던 빠리에 어느 새 봄이 왔다. ⓒ김두우리
어려서부터 나는 어떤 일이든 끝까지 애써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특별히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어서 라기보다는, 그냥 뭐든 적당히, 어느 정도 까지만 하면 쉽게 만족하고 이내 새로운 관심사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관심은 많았지만 뭐 하나 ‘끝’까지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매달린 적이 없었던 터라 ‘용두사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덕분에 매번 새로 시작만 하다 보니 남들은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제자리걸음 하고 있나 싶어 불현듯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초조해 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든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은 없고 곳곳에 숨은 수호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거란다”라고 하시며 그들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항상 중요하다고 다독거려 주셨다.

신기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매 고민의 문턱마다, 어려움의 순간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만났다. 그 손길은 때로는 실질적인 도움이기도 했지만 진심 어린 조언이나, 친구의 따뜻한 말 한 마디, 신부님의 ‘묵상 카톡’ 한 구절, 길을 가다 우연히 접한 어떤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참 소중했던 사람들과 값진 경험들도 많았다.

친절한 편지와 다정한 농담으로, 외로운 유학 생활에 '수호천사'가 되어준 교수님

나는 현재 프랑스에서 미술사 3학년에 재학 중인, 돌아오는 6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 평범한 유학생이다. 하지만 나에게 맞는 전공을 찾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며 안정적으로 생활하게 되기까지 고민과 선택, 변화를 거치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다. 사실 프랑스 유학을 결정하고, 대학에서의 첫 수업에 갈 때 까지도 확신은 없었다. 유럽 쪽 언어에 관심이 많고, 철학을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미술관과 박물관 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프랑스 고등교육 과정 중에서도 혹독하기로 소문 난 2년간의 프레빠 과정에 겁도 없이 진학을 했다. 과연 듣던 대로 빠듯한 일정과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교수님들 아래서 힘들었던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졸업을 했다. 2년간의 고생이 그랑제꼴이나 ENS와도 같은 명문대로 이어지지 못한 실망감이 들 법도 했지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친구들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교수님 한 분을 만났기에 행복했다.

한국에서 언젠가 프랑스는 관용(Tolérance)의 나라라는 말을 들었다. 정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과 전통의 가치를 알아보고 문화적 다양성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프레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관용 보다는 오히려 남을 자신의 기준대로 평가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논술식 철학과 문학 수업을 통해 분석적 사고(esprit critique)를 강조한 덕인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얘기하는 데 익숙한 반면에 포용력, 인내와 관용에 대한 개념은 경쟁심리 앞에 도태되어 버리고 만듯한 인상을 자주 받았다. (개개인의 특성 때문에 어떤 국가 전체를 배척하는 행위는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유럽 내에서도 ‘까칠'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동양적인 정서를 간직하고 살아가다 보면 이런 고정관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밖에 없을 때도 많다.) 다행히도 언어의 장벽은 없었지만 정서적 이질감에 익숙해지느라 시간이 필요했던 나를 가장 인간적으로 감싸주신 영문학 교수님 한 분이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학년말에는 칼 같은 채점으로 소문난 단호하신 선생님이셨지만, 외국에서의 첫 자취 생활과 프레빠의 압박감에 질려 무기력함에 빠진 시기에, 교수님의 친절한 편지는 힘이 됐고 수시로 건네시던 농담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자기만족을 위한 친절은 친절이 아니듯, 문학 작품을 대할 때도 작품이 원하지 않는 분석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매 수업마다 하시던 분 답게 수업 시간에도 학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불필요하게 몰아 부치는 일이 없으셨다. 사람을 대할 때, 어떠한 편견으로 단정 짓는 일이 없으셨고, “내가 줄 수 있는 시간과 조언을 줄 테니 그 다음부터는 너희의 몫”이라는 말씀처럼 학생들을 기다려 주셨는데, 그 기다림 속에는 무언의 응원과 위로가 담긴 것 같아 그 어떤 채찍질보다 동기유발이 되었다.

프레빠를 졸업하면서 미술사 3학년으로 대학에 진학을 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사이 교수님과의 연락은 뜸해졌다. 문득 떠오르면 ‘한 번 찾아뵈러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곧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열중했다. 다른 졸업생들과 교수님 이야기를 하며 새삼 프레빠의 치열함과 그 안에서는 어울리지 않던 교수님의 여유가 그리워져 연락이라도 드리자던 것도 결국 지나가는 생각에 그쳤다.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어리석게도 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뒤늦은 후회를 해 본다. 결국 친구들과 프레빠 강당에 다시 모인 것은 얼마 전 교수님 추모 행사에서의 일이었고, 오래된 전통에 따라 빨간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모인 우리는 씁쓸한 후회를 삼키며 유쾌한 교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장식들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았다. 특유의 영국식 유머감각을 기억하는 추모사들이 하나둘씩 이어지면서 엄숙했던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고 행사는 즐거운 동창회 분위기로 마무리 되었다. 매일같이 8시간씩을 함께 공부하며 정이 들었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 교수님을 기억하고 근황 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떨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결코 슬프지만은 않았다.

작년 세계 청년 대회,  관용과 친절을 전염시켰던 소중한 인연들

추모 행사에서 돌아온 후, 주위 사람들과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 앞으로 만날 사람들이 계속 생각났다. 특히 최근 François 1세 교황님 선출 소식과 그 당시 TF1 방송사에서 통역을 하는 이를 보니 작년 내가 통역했던 세계 청년 대회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나도 급하게 통역을 하게 돼 꽤 많이 긴장했었다. 
 
2011년 세계 청년 대회는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사실 청년대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개인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깊은 것도 아니다 보니 그저 막연한 기대감에 들떠 여행하듯 떠났던 것 같다. 막상 가서 생활을 하다 보니 비가 새는 지붕도, 돌이 밟히는 흙길에서의 새우잠도 힘들었지만 어쩌다 맡게 된 통역자의 역할도, 그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격려해 주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모두 어느 순간 내게 주어진 큰 선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특히 그 안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했다. 나를 필요로 해 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고마움을 느껴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있는 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간단한 생각이 새삼 마음에 와 닿았다.

2012년 마드리드의 ‘지구촌’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 때 들었던 생각들,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일상생활 안에서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 추억들 덕분에 일상의 여러 면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한결 풍부해지고 깊어진 것 같아 내심 그때의 대회기간이 그리워진다. 전문 통역사가 아닌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신 신부님이나, 내 크고 작은 실수들을 웃음으로 넘기며 감싸준 사람들 덕분에 나도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 관대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친절과 관용의 전염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지금 내 모습이 있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변화할 내 모습 안에서 수많은 이들의 말과 생각, 태도 등 다양한 면모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수호천사들 덕분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기도에 담아 하느님께 올려본다.


 
하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한국으로 귀국해서 초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일곱 살에 다시 영국으로 가서 3년을 살았다. 한국 초등학교와 중학교, 프랑스계 국제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 왔다. 고등학교 땐 이과였는데 언어와 미술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술사를 공부 했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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