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인 타임(In Time), 앤드류 니콜 감독, 2011년작

영화가 아무리 상상의 산물이라지만 냉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줄 때 현실보다 더욱 강하게 다가오는 현실감은 소름을 돋게 한다. 많은 SF영화들이 표면적으로는 가상의 세계를 그리는 듯하지만 한 껍질을 벗겨내면 피부에 와 닿는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데, 특히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중에서 우회적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이 영화 <인 타임>이 딱 그렇다.

 
시간이 곧 화폐인 세상, 시간을 벌어야 살 수 있다.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영화 속 미래에서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그냥 늙지 않으면 다행인데,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이제부터 시간은 살벌한 존재가 된다.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의 유예 시간을 제공받는다. 사람들은 팔뚝에 새겨진 시간으로 음식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집세를 낸다. 그러니까 시간은 화폐를 대용해 사용된다. 커피 1잔 4분, 권총 1정 3년, 스포츠카 1대 59년, 이런 식으로 모든 비용은 시간으로 계산된다. 그리고 시간은 또한 생명인지라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13자리 시계가 0이 되는 순간, 그 즉시 사망한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또 생물학적 삶을 존속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을 모으지 않고 탕진하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수백만, 수천만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갖는 유한성 그리고 그것은 각자에게 주어졌다는 관념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자원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시간은 더욱 돈처럼 취급되고 중요한 관리품목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시테크’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하엘 엔데는 이미 자신의 소설 <모모>에서 그런 점을 비판했다.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던 평화로운 마을에 시간도둑 ‘회색신사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시간저축은행에서 왔다며, 시간을 절약하여 저축하면, 이자가 이자를 낳아 인생의 몇십 배가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선량한 사람들을 꾄다. 회색신사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사람들은 여유 없는 생활에 쫓기고, 시간과 함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의미까지도 잃어가게 된다. 모모는 도둑맞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찾아주기 위해 예지의 상징인 신비로운 거북,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회색신사들과의 결투를 벌인다.(이 소설은 시간의 문제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다.)

▲ 저렇게 팔에 새겨진 시간을 보며 허겁지겁 살아가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당분간 살아갈 시간을 팔뚝으로 받아낸다.
주인공 윌 살라스는 매일 아침 자신의 남은 시간을 보며 생활과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일하러 나간다. 불로의 몸을 받아 외모만 보면 그의 애인으로 오해될 듯한 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헤밀턴이라는 남자를 구해주는데 그가 시간이 착취되는 시스템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헤밀턴은 자신에게 남은 100년가량의 시간을 윌에게 넘겨주고 죽는다. 일종의 자살이다.

윌은 거액을 거져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횡재했는데, 그러면 뭐 하나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갑자기 올라버린 버스비를 자신의 남은 시간으로 감당 못해 급하게 뛰어가다 아들 윌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다. 영화를 보면 갑자기 시간물가가 올라가는 대목이 나온다. 시간을 통제하는 지배층에서 서민들의 시간을 쪽쪽 빨아먹는 것이다.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시간을 흡혈 당하는 모습은 여러 뱀파이어물의 스토리를 연상한다. 사실 불사의 뱀파이어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최근에는 <안녕, 프란체스카>처럼 뱀파이어가 소수자를 상징하는 경향도 있지만.)

소수의 영생을 위해 다수가 죽어야 하는 시스템, '시간은행'을 습격하라

하여튼 윌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엔 헤밀턴을 살해한 용의자로 쫓기기도 한다. 이제 그는 소수의 영생을 위해 다수가 죽어야 하는 현 시스템을 파헤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자들만이 모여 사는 ‘뉴 그리니치’로 잠입한다. 거기서 시간의 수호자인 타임 키퍼에게 체포될 위기를 맞지만, 와이스 금융사의 회장 딸 실비아를 인질로 삼아 간신히 탈출한다. ‘뉴 그리니치’에 침입한 윌이 의심을 받게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곳에서 매사에 빨리빨리 움직였다는 점이다. 많은 시간을 가진 인간들은 굳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여간 윌은 실비아와 함께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시스템을 조금씩 붕괴시켜나간다. 그러니까 시간은행을 습격해 그걸 훔쳐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으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그 세계의 혁명이 시작된다.

▲ 버스값이 올랐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하게 아들을 만나야 한다. 정말 시간이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을 벌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남 같지 않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다 보니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극단적 상황들이 더욱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는데, 영화 속 시간을 자본으로 치환시키면 현실과 많은 것이 맞닿는다.(영화처럼 자본이 많다고 훨씬 오래 살지는 않겠지만.) 사실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 중 하나는 시간과 싸움이었다.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이 그렇다. “일해도 보람도 없는 노예 같은 생활은 싫어. 8시간은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이어라. 하느님 내리신 소중한 축복을 우리는 왜 누릴 수 없는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자본가에게 착취 당하는 시간을 찾기 위해 싸웠다. 노동시간은 자본축적과 등가이기에 직접 자본가에게 착취당한 것을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자본가에게 더 뺏기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처럼 시간은 자본 그 자체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자본이 활동하는 자리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1990년대 초에 비교적 인기가 좋았던 진보적 월간지 <사회평론>에서는 당시 생기기 시작했던 24시간 편의점을 두고 이제 자본이 공간을 넘어 시간을 침투해 들어간다는 분석이 실렸다. 사실 편의점이 처음 생겼을 때 참으로 신기했다. 밤늦게 공부하다 출출해지면 친구들과 게서 사발면이나 여러 먹을거리를 사 먹었다. 온갖 것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고, 언제라도 가서 물건을 살 수 있다. 한마디로 소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속 시간은 지금 세계의 비참을 양산하는 원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금융자본을 연상케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돈이 유통된다. 우리가 보통 돈 하면 그것이 상품, 서비스를 통해 유통되는 돈을 즉물적으로 느끼지만 그것의 거진 백 배쯤 되는 돈이 투기자본으로 세상을 유령처럼 떠돈다. 사람들은 피가 튀면서 지저분하게 흡혈당하지 않지만 체계적으로 아주 차분하게 흡혈 당하는 시스템이 현재의 금융자본 시스템이다. 숫자가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한 나라의 경제가 치명타를 입는다. 한국의 IMF 사태가 그 대표적 예다.

금융자본의 해악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어 그것이 파국을 불러올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속수무책이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세상의 벽이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흔들면서 갖고 논다. 하지만 그 세상의 벽도 결국 인간이 만들었던 것이기에 인간 자신이 허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시간의 벽을 허물어가듯,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지구동포들은 소수의 탐욕이 쌓아올린 저 벽, 탐욕과 숫자놀음으로 떠도는 유령 같은 벽을 허물어갈 지혜와 실천을 창출해낼 수 있을까?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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