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배선영]

내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다’와 ‘의아하다’다. 어릴 때 성가대 선생님을 좋아해서 교회에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교회나 절에 다녀본 적이 없고 종교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박홍기
'신자 이미지'가 따로 있어요?

얼마 전,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지인을 거의 3년 만에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세례를 받은 일과 성당에 다니고 있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종교를 가지게 된 일이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의 종교생활에 관한 얘기들을 죽 듣고 난 후, 그는 조금 놀라워하며 “선영도 참 비종교적인 사람인데, 선영하면 反 종교였는데......”하며 웃었다. 그가 생각할 때 내 이미지는 종교와 내가 별로 어울리지 않았나 보다. 조금 억울하다. 나는 정말 성실하게 1년 동안 예비신자로서 교리수업을 받고 나름 까다로운 과제들을 수행한 후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매주 미사를 드리고, 전례 활동을 하고, 피정도 다녀오고 견진성사도 받았으며 성실하게 종교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그의 생각과 달리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신성함에 대해 겸허함을 가지며 지내는 중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종교적’인 이미지란 무엇이고, ‘종교적’인 이미지란 무엇일까? 교회는 종종 사람 됨됨이와 연관된다. 종교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과 가볍게 수다를 떨 때에도 ‘종교인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있구나’ 하고 느낀다.

언젠가 친구 A가 동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친구 A의 동료는 평소에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상냥했는데, 갈등이 생기자 큰소리로 화를 내고 무례하게 행동해서 A를 많이 힘들고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사람이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이다. A는 내가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동료와의 일을 얘기하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그 동료와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좀 실망했다”고 솔직한 생각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고 듣기 힘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 사람 고유의 인격이나 품성을 넘어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까지 관련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비난과 실망의 수준은 한 단계 더 높아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이런 기대가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면서 기대에 부합하거나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 A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난감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전에는 없었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잣대가 나에게 드리워진 것이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임을 항상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까). 내가 화를 내거나, 어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면 그 때문에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될까. 나는 내가 믿는 종교의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단순히 내 마음 편안하자고 다니기 시작한 교회인데, 뭔가 아주 복잡하고 커다란 숙제를 안게 된 것 같았다.

누군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닌 내 모습 그대로  신앙 생활 하고 싶어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종종 드러나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곤 한다.

몇 달 전 예수회 청년토크에서 ‘성(性)’을 주제로 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순결하고 순진한 여성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제시한 강연 내용과 그 강연에 감동하는 청년들을 지켜보며 내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마녀 취급을 받겠구나’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견진성사 때문에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들과 모였을 때였다. 어떤 분이 예비신자일 때가 오히려 더 편했다며, 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셨다. 나는 미사를 빠진다고 고해성사를 드려야한다는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무척 놀라웠다. 미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지 몰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미사 전에 드리는 형식적인 고해성사는 하고 싶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적인 위안과 평화를 기대하며 다니기 시작한 교회인데,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를 건너 거대한 무엇인가를 맞닥뜨린 것만 같았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단순히 미사 드리고 기도 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미사와 기도도 중요한 종교생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깊이 있고 내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종교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피정이나 강연 등에 참여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가톨릭 행사에 참여할수록 본당에만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갖가지 문제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고민에 빠지곤 한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제시하며 점점 더 삶의 깊은 곳까지 파고 든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리아처럼 온화한 미소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모든 사람을 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렇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건 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을 보면 불편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종교인은 친절하고 온화한 모습인 것 같아 부담스럽다. 내 행동이 자칫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질까 봐서다. 사실 이건 명백하게 논리적 오류인데, 항상 친절하고 웃음짓는  태도가 언제나 진실한 사랑을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치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해야 할 일이지, 신자들만의 특수한 덕목도 아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 동안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성서모임에 나가고 성경책을 읽었다. 성경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되새기고 싶은 가치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이것이 내가 교회 안에서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행동으로 이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교회 안과 밖에서 기대하는 모습의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고민없이 내가 가진 본연의 모습과 생각을 버리면서 교회의 규율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톨릭 신자로서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부담이 없진 않지만 교회의 규율이나 이미지로 나를 얽매이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 안의 선함을 믿으며 자유롭고 충만하게 살고 싶다.

 

 

배선영(다리아)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을까를 고민하며 20대를 보냈다.
 이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를 고민하며 30대를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