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총장 아루페 신부, 요한 바오로 2세와 갈등 빚어 사임해

제266대 교황으로 예수회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선출되면서, 지난 30년 동안 교황청의 지원 아래 승승장구하던 오푸스 데이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푸스 데이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비호아래 정치력을 키워왔으며 교황청 뿐 아니라 특별히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 교회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왔다. 이번 새 교황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구장이었으며, 오푸스 데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한 예수회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오푸스 데이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커졌다.

▲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오푸스 데이 창설자 (사진출처/오푸스 데이 한국지부 홈페이지)
오푸스 데이, 지난 30년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승승장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오푸스 데이를 창설한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오푸스 데이를 교황청에 전격적으로 진입시키지 못했다. ‘일상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오푸스 데이는 에스크리바가 999개의 격언을 모아 영적 안내서인 <길>을 쓸 때까지만 해도 매력적인 영성운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에스크리바는 로마로 가면서 ‘바티칸의 게임의 법칙’을 배웠으며, 엄격하고 권력에 굶주린 관료주의를 낳았다.

에스크리바는 자신과 추종자들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가톨릭 교회 안의 ‘부패’와 싸우는 ‘기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골몰했다. 그래서 행정부와 산업계, 금융계, 언론계에 진출할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고자 열망했다. 1973년 오푸스 데이 동조자인 카레로 블랑코 수상이 암살될 때까지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스페인 정부의 각료와 은행장에 오푸스 데이 회원이 포진하고 있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가 지역 주교들의 관할권을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적 관할권을 갖는 ‘면속구’로 승격되는 데 반대해 왔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보이티야 추기경(요한 바오로 2세)은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와서 3년 전에 죽은 에스크리바의 유해가 안치된 지하납골당에서 기도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 동조자인 팔라치니 추기경을 시복시성성 장관으로 임명했고, 팔라치니는 에스크리바의 시성을 심사하는 최고 자문위원으로 에스크리바의 후계자인 폴틸리오를 임명했다.

1982년 오푸스 데이는 면속구로 추인되었고, 교황은 직접 오푸스 데이 소속 사제들에게 서품을 주었으며, 오푸스 데이 소속 사제인 오카리츠는 라칭거 추기경이 맡고 있는 신앙교리성의 최고 자문위원이 되었다.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그중에서도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미국 CIA와 더불어 칠레 아옌데 대통령을 실각시킨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중 한 명이었던 헤르난 쿠빌로스는 쿠데타의 주역인 피노체트 군사정권에서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해방신학을 추인하고, 기초공동체를 격려해 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황의 주교임명 독점권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오푸스 데이 소속 주교 등 보수적인 인물을 대거 라틴아메리카 교회에 이식했다. 다행히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을 추구했던 브라질의 아른스 추기경과 로샤이더 추기경 등은 프란치스코회 출신이었으며,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라틴아메리카 수도자연합’(CLAR)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이어갔다. 수도회는 회헌·지도자 선출·재정 조달 등에서 독립적일 뿐 아니라 창립자의 고유한 카리스마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예수회 아루페 총장과 교황청.. 내내 갈등 빚어

▲ 페드로 아루페 예수회 총장(사진출처/ http://www.jesuit.org/blog/)
그중에서도 이번에 교황을 배출한 예수회는 가장 강력한 수도회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회 창설자인 로욜라 이냐시오는 1526년 종교 재판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예수회원들은 특별히 아메리카 대륙 선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영화 <미션>에서 보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와 마찰을 일으켜 논란거리가 되었다. 결국 18세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추방되었고, 1773년에 클레멘스 14세 교황은 골칫거리였던 예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다시 복권된 예수회는 가톨릭교회의 동아시아 선교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예수회원인 독일의 칼 라너와 미국의 코트니 머레이 등이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회기였던 1965년에 총장으로 취임한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이끄는 예수회는 오푸스 데이와 달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줄곧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루페 신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될 때 일본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정의평화운동에 관심이 컸으며, 제3세계와 대화하고 투신하려는 예수회원들을 격려했다. 특히 군사정권아래서 고통 받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감행했다. 1974년에는 복음 선교와 사회정의를 동일시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조차도 이런 예수회의 정치사회적 투쟁과 당파적 선택을 걱정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에 교황청과 예수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건강상 이유로 아루페 총장은  1980년 사임을 표명했다. (그러나 당시 아루페 총장은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자 교황은 예수회에 후임자 선출을 위한 회의를 연기하라고 명령하고 총장 선거에 개입했다. 교황은 예수회 내규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자기 사람인 80세의 이탈리아인 예수회원 파울로 데자 신부를 임시총장으로 지명했다. 이에 많은 예수회원들은 이런 교황의 방식에 격분했다.

이후 1981년에 아루페 총장이 갑자기 중풍에 걸리면서 1983년 9월 3일 33차 예수회 총회에서 레바논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 언어학자 피터-한스 콜벤바하 신부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발언하는 일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어서 처음엔 아무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골벤바하 총장은 아루페와 마찬가지로 해방신학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2만 5천명의 예수회원들에게 신자들의 신앙을 깊게 하고, 동시에 보다 나은 사회를 추구하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참여에 적극 나서도록 권고했다. 비록 예수회는 교황청에서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포함해 제3세계에서 성소자가 크게 늘어나 안정적인 활동을 전개해 갔다. 한국 예수회의 경우에도 1980-90년대에 성소자가 급증했고, 현재 제주 강정에서 예수회원들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평화운동에 깊이 투신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충성할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2년 오푸스 데이의 청설자인 에스크리바를 성인으로 선포한 이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1994년에 로마에서 사망한 오푸스 데이 2대 단장인 알바로 델 뽀르띠요를 2012년 시복 전 단계인 ‘가경자’로 선포했다. 이처럼 두 전임 교황들은 오푸스데이에 대한 각별한 친밀감과 애정을 표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푸스 데이 역시 ‘교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수시로 공표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도 전임교황에 대한 태도와 다름없는 충성을 맹세할지 주목된다. 귀족주의를 선호하는 오푸스 데이가 폭탄 세레를 견딜만한 방판유리를 장착한 시가 56만5000달러(약6억5000만원)의 전용차량에 탑승하던 베네딕토 16세 교황 대신에 전용차 탑승을 거부하고 추기경 시절처럼 공용버스를 이용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까?

▲ 사진 출처/오푸스 데이 한국지부 홈페이지 갈무리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발표 후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장인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는 교황선출을 기원하며 장문의 사목서간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를 앞두고 에스크리바가 한 말을 옮겨 적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가올 교황 선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황님에 대한 사랑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영적인 힘을 다해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어떤 분이 되시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새로 오실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그분을 섬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크리바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요한 23세 교황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비판해 왔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만 충성을 다했다. 한편 지난 3월 13일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던 당일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장 에체바리아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 순간이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새 교황님 프란시스코 1세는 베드로 성인의 266번째의 후계자입니다. 흰 연기를 보았을 때부터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지금은 베네딕도 16세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새 교황님께 존경과 순명을 약속드립니다”(전문)라는 짧은 논평을 내놓았다. 그들이 친애하던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부탁을 오푸스 데이가 얼마나 새겨들을지 주목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성베드로성당 발코니에서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인사했는데, 오푸스 데이에게는 ‘나쁜 저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 사진출처/ http://www.jesuit.org/blog

 스페인 빌바오에서 1907년 11월 14일 태어난 아루페 신부는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의사의 길을 중도에 포기하고 1927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32년 스페인정부가 스페인의 예수회를 해체하자,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Cleveland, Ohio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뉴욕시에 사는 스패니쉬 및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였다. 1938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날 12월 8일 아침 무염시태축일 (Immaculate Conception) 미사를 드리던 중 체포되어 한동안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2년 일본의 예수회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수련원장(master of novices)으로 활동하였고, 히로시마 외곽에 거주하고 있던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때 의사로 수련을 받은 경험을 살려 그는 수련생들과 함께 첫 번째 사고현장에 도착한 구조대를 지휘하였으며 그 경험을 “A permanent experience outside of history, engraved on my memory” 이라고 후에 술회한다. 1958년에 초대 일본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1965년까지 지내게 된다.

1965년 31차 예수회 총회에서 28대 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그의 예수회원으로서 꿈의 결실은 1975년 32차 총회의 “Our Mission Today: the Service of Faith and the Promotion of Justice” 선언문(decree)에 나타난다. 이 선언문은 기본적으로 모든 예수회원들의 활동이 ‘정의’와 ‘가톨릭 신앙’의 도모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혼합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었기에, 예수회원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정의구현에 연결시킨것은 과감한 내용이기도 하였다. 이 선언문은 투표에 넘겨지기전 격렬한 토론을 거치기도 하였지만 총회의 마지막 날인 1975년 3월 7일 참석한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된다.

1981년 8월 7일 극동 아시아 지역의 오랜 여행 끝에 로마에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중풍을 겪었고 곧 우측전신마비와 몇 마디의 대화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가 곧 증세가 악화되어1991년 2월 5일 타계할 때 까지 가까이서 수발하는 동료 예수회원들과는 눈짓과 손에 쥐어지는 압력으로만 소통을 하였다.

막중한 예수회 총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사임의사를 밝히자 예수회는 1983년 9월 3일 33차 총회에서 후임으로 Peter Hans Kolvenbach신부를 선임하였다. (주: 아루페 총장신부의 사임은 예수회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하고 있는 예수회 총장의 사임이 되었다. 현 총장이신 Kolvenbach 신부님께서 사임의사를 밝히셔서 예수회는 2008년에 총회에서 후임 총장을 선임할 계획임) 휠체어에 실려 33차 총회 개막식에 참석한 아루페 총장은 자신이 쓴 아래의 기도문을 낭독하게 하였다.

“More than ever I find myself in the hand of God.
This is what I have wanted all my life from my youth.
But now there is a difference;
the initiative is entirely with God.
It is indeed a profound spiritual experience to know and
feel myself so totally in God’s hands.”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요 보좌관중의 한 분이셨던 Vinnie O’Keefe신부는 “아루페 총장은 두 번째 이냐시오 였으며, 2차 바티칸총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예수회를 재창설하신 분”이라고 술회하였다.
 

*이 글은 '뉴욕 그리스도인 생활공동체'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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