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루카 22, 14 - 23, 56

오늘 우리는 루가복음서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이 수난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대조하여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인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최후만찬에서 유언을 남깁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 쏟는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서로 다툽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툽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부터 줄곧 있어온 다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여 남을 지배하며 군림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눈치를 살피는 그런 강자(强者)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그대들 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질서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과 좌절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곳에는 사랑과 희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배하지 않고, 섬겨서 그 생명을 행복하게 합니다. 효도, 부부애, 우정, 이런 것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섬김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스승을 모른다고 공언합니다. 그런 행동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버립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을 찾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의 이중성을 신물 나게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예사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異敎徒) 지배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총독만이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 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정치범이 됩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로마 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세력의 주모자가 된 셈입니다. 식민지 유다의 지도자들은 오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마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유대교의 제도였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茶飯事)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이는 악(惡)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대로 이 수난사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말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 복음서는 말했습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 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그는 불편한 인물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는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삼자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 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괘씸한 죄인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에 앉으면,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며,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라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이 우리 안에 보이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우리의 죽음 너머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인 당신은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 곧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소에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당신을 미워하며 죽이려는 의도를 보면서도,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일에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섬김과 용서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 곧 미사는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 안에 살아있게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섬김과 용서의 빵을 먹고, 섬김과 용서의 피, 곧 생명을 마시면서 섬김과 용서를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인류역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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