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 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오른다. 아르헨티나 철도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 교황이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서 광장을 메운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이탈리아어로 전한 첫마디는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합니다”였다. 지상에서 날마다 ‘좋은 저녁’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교황뿐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위로가 되는 한 마디다.

▲ 교황 프란치스코, (사진출처/유튜브 Pope Francis: Jesus' message is mercy 갈무리
유럽이 식민지 경영으로 일찍부터 ‘좋은 저녁’을 누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식민지 생활과 군부독재의 억압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나쁜 저녁’을 견디고 있었다. 그래서 이 대륙의 주교들은 메데인(1968년)과 푸에블라(1979년)에서 열렸던 주교회의에서 민중사목을 첫 번째 사목목표로 정하고, ‘해방’을 갈망해 왔다. 이 대륙에서 해방신학이 출현하고 수많은 기초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며, 이 때문에 많은 선교사와 사제와 수도자와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순교‘당했다’.

오푸스 데이의 설립자인 스페인 몬시뇰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선종 후 27년 만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는 33년이 지나도록 논의만 무성할 뿐 시복조차 되지 않았다. 그동안 교황청은 여전히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축성하는데 주저해 왔다. 오로지 오푸스 데이 소속 사제들처럼 로메로 대주교와 생판 다른 인물을 라틴아메리카 교회에 심는데 주력해 왔다. 이처럼 ‘슬픈 저녁’을 여지껏 맞이했던 대륙에서 교황이 출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있던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저지른 ‘더러운 전쟁’ 시기에 침묵함으로써 빈민사목에 종사하던 예수회 신부 2명이 군에 연행돼 가혹한 조사를 받도록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로메로 역시 대주교가 되기 전에는 대표적인 ‘보수적 주교’로 꼽혔던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입장에 앞서 ‘복음에 대한 충실성’이 있느냐 여부다. 어쩌면 때로 우유부단했던 자에게 성령은 새로운 사명 안에서 다른 충실함을 요구하실지 모를 일이다.

▲ 사진출처/ 유튜브 Pope Francis: God never tires of forgiving us 갈무리

남루한 수행자의 발에 입 맞추는 교황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첫 인사에서 ‘교황’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신을 ‘로마 주교’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지역교회의 한 사람으로 소개한 그분은 이름처럼 겸손한 교황인 모양이다. 신자든 아니든 우리시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다. 이 성인은 사제도 아니었고, 다만 남루한 수행자였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영화 <형제인 해와 누이인 달>(Brother Sun Sister Moon, 1971)을 보면, 프란치스코가 동료들과 수도회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간다. 붉고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추기경과 주교들에 둘러싸인 채 높은 보좌에 앉아있던 이노센트 3세 교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단을 걸어 내려와 갈색 자루를 걸친 보잘 것 없는 프란치스코에게 다가와 묻는다. “프란치스코 형제,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고?” 이때 프란치스코는 “성하, 다름이 아니라, 그저 저희가 복음의 방식에 따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교황은 무릎을 꿇고 가난한 수행자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말한다. “프란치스코, 자네처럼 젊은 사내였을 적엔 나도 복음에 따라 살고 싶었다네. 하지만 그 뒤 직책과 위엄 속에 들어서고 나선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 그러나 자넨 형제들과 함께 거룩한 복음의 방식에 따라 걸으며 살고 있군.” 교황권이 중세기 최고조에 달하던 13세기에 이노센트 교황은 걸인과 다름 바 없던 프란치스코에게 감화되었다.

▲ Brother Sun, Sister Moon, 1972년, 감독: Franco Zeffirelli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늘을 나는 새와 들꽃처럼 살고 싶어 했다. 청빈으로 벗을 삼고, 새들에게 설교하며, 토끼와 물고기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숲을 사랑했지만, 굳이 벌목을 하더라도 바닥에서 1미터 쯤 높이에서 잘라내어 “그래도 희망을 가지도록 해야한다”고 여겼다. 나무를 끌어안고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프란치스코는 1979년 국제생태학협회의 제청으로 교회에서 ‘생태계의 수호성인’으로 지명되었다. 늑대를 길들이고, 십자군과 싸우던 무슬림의 술탄을 만나 친구가 된 사람이다. 생태계 위기를 겪고 있는 지구, 언제 전쟁이 터질지 여전히 분쟁지역으로 남을만한 한반도에서도 그분은 ‘생명평화’의 상징이다.

이번에 교황이 되어 ‘좋은 저녁’을 입에 담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노센트 3세 교황처럼 ‘권력의 덧없음’을 가난한 이들의 희망 안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가장 가난한 자의 발에 입을 맞추는 사람, 발밑의 미물에게도 해방을 전하며, 제3세계 민중에게 ‘좋은 저녁’을 약속하는 ‘착한 목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아침 ‘창’을 열어 깊이 호흡하고 싶다.

다행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의 대주교가 되어서도 대주교 관저에 머물지 않고 작은 아파트를 얻어 생활했다고 한다. 직접 식사를 준비하고 운전사가 딸린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내가 만일 교황으로 선출되더라도 교황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지 말고 대신에 그 돈을 가난한 이에게 기부하라”고 말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는 다음 날인 14일 성마리아 대성당에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교황의 전용차 대신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버스에 탑승했다. 콘클라베에 들어가기 전에 묵었던 호텔에 들러 직접 숙박료를 지불했으며, 그를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에게 “하느님께서 나를 뽑은 당신들을 용서했으면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이 순간에 아쉽게도 33일 동안 교황좌에 머물렀던 알비노 루치아니,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떠오른다. 1978년 콘클라베에서 네 번째 투표에서 바로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수시로 밝혔던 사람, 그 교황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미소 교황’(Il Papa del Sorriso)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라 부르며 사랑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교황청 꾸리아(관료집단)와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던 바티칸은행을 개혁하려고 했으며,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이라고 선언했던 교황이었다. 황금 교황관을 거절하고, 대관식을 폐지하고, 교황좌에 걸어서 올라간 ‘종중의 종’다운 형제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권력’을 지긋이 내려놓고 다른 주교들과 나누며,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형제’로 불러세우고, 초기교회처럼 여성들을 사도로 다시 불러주기를 기대한다. 지난 30년 동안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거절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창문을 다시 열고,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그리고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꿈꾸었던 교회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열망한다.

지난 30년은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억누르고, 평신도들을 사제에게서 떼어내 성직주의를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가로막으며, ‘자유총연맹’ 같은 가톨릭 우익세력에게 가톨릭교회를 내어준 시절이었다. ‘연민’을 심문하고, ‘투신’을 탄핵했던 교회에 이제 봄바람이 불어올 차례다. 오늘 아침 ‘창’을 열어 깊이 호흡하고 싶다. 좋은 저녁이다.

*<경향신문> 3월 15일자 ‘낮은 목소리’에 게재되었던 글을 보완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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