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문양효숙]

나와 순이의 관계

개를 좋아한다. 몰래 강아지를 데려와 방에서 기르다가 낑낑대는 소리를 눈치챈 엄마에게 강아지와 함께 쫓겨나기를 두어 번, 고등학교 2학년 때 언니들과 함께 결사투쟁을 외치며 생후 한 달된 말티즈를 데리고 왔을 때, “목욕 및 화장실 치우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하겠다”는 딸들의 난리법석 탓이었는지, 짓지도 못하고 꼼지락대는 작은 생명이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그 강아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순이’는 우리 집 식구가 됐다.

▲ 말년의 순이. 셔터 소리에 잠을 깨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다. ⓒ문양효숙 기자
개를 기르던 내 친구는 이렇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면서 “분명 신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없어서 개를 허락하신 거야. 천사의 현현이야”라며 하트뿅뿅의 눈빛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순이에게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 순이는 ‘그런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순이는 이름과는 달리 순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민하고 앙칼진 성격의 개였고, 무엇보다 나를 ‘밥 주고 화장실 치워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아빠나 언니에게는 잘만 하던 ‘배 긁어줘’ 자세도 내게는 보인 적 없으며 “순이야~”하고 반갑게 부르면 뛰어오긴 커녕 제자리에서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널 데려온 게 나란 말이다아~!”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도통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순이를 무척 예뻐했다. ‘손!’, ‘기다려!’ 등 남의 집 개들은 잘만 하는 쉬운 재주 하나 없는 그런 순이를, 심장이며 기관지며 안 아픈 곳 하나 없이 병치레했던 노년기를 포함해 17년 간 친구처럼, 가족처럼 아꼈다.

순이를 하늘나라로 돌려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제역 파동이 일었다. 신문에 거대한 구덩이에 돼지를 몰살하는 사진이 실렸다. 산채로 트럭에서 쏟아지는 돼지들을 본 순간, 식탁 위 삼겹살은 내게 ‘순이’가 됐다. 고기가 아니라 감정을 지니고 뛰어다니는 한 마리 동물이 되어내게 걸어온 것이다. 그날 나는 고기를 끊었다.

미안, 널 먹고 입을 수가 없어

결심이나 당위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닌지라 실은 ‘못 먹게 됐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날 이후 고기가 목으로 넘어가질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간혹 누군가 “채식주의자세요?”하고 물으면 “편식주의자예요”라고 답한다. 무슨 이념과 철학에서 비롯된 실천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생선도, 달걀과 우유도 잘 먹는다. 이런 이들을 엄격한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과 구분해 페스코(Fesco)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런 범주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그간 몇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공장식 사육과 도축이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됐다.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살을 찌운 뒤 죽음을 맞이하는 동물들의 삶을 만났다. 짐작 했던 세상이었다. 다만 그 세상이 나에게 왔는가 오지 않았는가, 나와 상관없는 세상인가 내 경계 안에 들어온 세상인가의 차이였다.

▲ 리핑버니 마크
그 세상을 만나자 불편한 것이 많아졌다. 시작은 가죽제품이었다. 신발과 가방을 만드는 연한 가죽을 위해 한 마리 송아지가 어떤 삶을 살고 마무리하는지 봤기 때문이다. 비록 예전에 산 물건을 버릴 만큼 과감하지는 못해도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나 가방을 새로 사지는 않게 되었다. 화장품도 맘 편히 살 수가 없었다. 내 피부 안전을 위해 토끼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동물실험 원료 무첨가 인증마크인 ‘리핑버니’ 마크를 단 화장품을 찾았다. (유럽연합(EU)은 지난 3월 11일부터 동물실험을 통해 개발된 화장품과 원료 수입에 대한 전면 판매금지 조치를 취했다.) 동물원과 놀이공원 돌고래 쇼를 대면하기 힘들어졌다. 자유를 빼앗긴 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그들을 보며, ‘포로수용소’가 연상됐다. 여전히 오리털 점퍼를 입고 어느덧 화장품도 이것저것 섞어 쓰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피하는 게 많아졌다.

다양한 채식의 이유, 먹는 행위가 과연 윤리적이어야 할까?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와 같은 감정적 이유도 있지만, 건강을 위해서나 공장식 사육과 도축에 반대해서,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최훈, 사월의책, 2012)에서 철학 교수인 저자는 취향이나 건강이 아닌,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권한다.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들에게 가하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육식은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가 존중 받아야하는 것처럼 동물의 권리도 인정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종차별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물에 대한 차별이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과 본질에서 하나도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대동물원의 기원을 밝힌 <동물원의 탄생>(니겔 로스페스, 지호, 2003)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동물을 대량 포획했던 하겐베크 기업의 동물전시사업이 아메리카 원주민, 에스키모인, 베두인 등을 대상으로 한 ‘인간전시사업’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독일 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누군가 도살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동물일 뿐이야’라고 생각할 때 마다 아우슈비츠는 시작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다른 종(種)인 그것’과 내가 대등하다는 것을, 나아가 모든 생명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박홍기
밥상에 무슨 철학이나 윤리가 필요할까 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내가 먹는 행위 앞에 전보다 경건해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 훨씬 섬세해졌다는 것이다. “식물은 뭐 다르냐?”고도 많이 묻는다. 맞다.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독한 농약 맞아가며 좁은 땅에서 많은 양을 내는 시스템, 똑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식물은 피 흘리지 않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가끔 미안해하면서 감사히 먹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을 물을 수밖에 없다. 내게 채식은 선언이 아니라 그저 마음과 가치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방법일 뿐인데, 이 사소한 행위가 정치·윤리의 문제로까지 이어지니 역시 정치는 ‘먹고 사는 문제’인가보다.

살아있는 한 먹어야 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다른 생명을 내 안에 받아들일 것이다. 언제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먹혀줘서 고맙다. 부디 내 한 몸 지구별에 살면서 다른 생명에 무신경하게 고통을 주고 싶진 않은데, 쉽지 않다. 언젠가 따스한 고기 한 점 상추쌈에 올려놓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먹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말이다.

사무실이 있는 합정동 골목 사거리에는 코너마다 고깃집이 있다. 사무실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며 줄줄이 늘어선 고깃집들을 볼 때마다 고기집이 원래 이렇게 많았던가, 사람들이 고기를 이렇게 많이 먹었던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퇴근길, 수많은 고깃집 사이를 걸어가며 기도해야겠다.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누군가의 고통이 늘어나지 않기를, 욕구(need)가 욕망(desire)으로 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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