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12]

 한동안 신전의 무너진 돌기둥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비록 15년 만에 단명해버린 왕조의 수도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일찍이 유래없이 찬란한 문예부흥의 서막을 열어놓았던 아마르나 시대의 다채로운 영상을 그려보다가, 다시 말라위 시내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어디선가 짐을 잔뜩 싣고 달려가던 트럭이 한 대 나타나더니 크락션을 요란하게 빵빵 울렸다. 무심히 앞만 보며 걸어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운전석 옆에 타고 있던 모슬렘 농부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어디로 가고 있냐고. 그래서 얼른 바하리야 오아시스의 바위티(Bawiti)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짐칸에 가축과 파를 잔뜩 실은 고물트럭에 올라 황사가 뿌옇게 이는 메마른 사막 길을 달려가는 동안, 군데군데 작은 오아시스 마을이 나타나면서 대추야자나무 숲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빈번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한동안 메마른 사막풍경만 바라보다가, 녹음이 우거진 오아시스 마을의 대추야자나무 숲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베르베르인 목동들의 눈처럼 새하얀 옷차림을 보게 되자, 마치 ‘여름에 내린 눈’을 보고 있는 것 처럼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말라위 지역을 출발한 트럭이 바하리야 오아시스를 향해 점차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디선가 아랍경찰들이 나타나면서 삼엄한 검문검색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검문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니, 아랍전통복장을 한 이들은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쉽게 통과시켜주면서, 외국인에게만은 매번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며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아랍경찰들의 상투적인 질문에 번번이 꼭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도 상당히 성가신 일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꾀를 내어, 모슬렘 농부가 트럭 속에 여벌로 준비해 두었던 아랍전통의상을 빌려 잠시 입기로 했다.

▲ 여름에 내린 눈. ⓒ수해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340㎞ 떨어진 바하리야 오아시스의 바위티 마을에 있는 ‘오아시스 유산 박물관(Oasis Heritage Museum)’에는, 1990년대에 현대 미술가 마흐무드 이드가 설립해 놓은 이집트 서부 사막 오아시스와 관련된 미술품과 민속공예품이 다량 소장되어 있었다.

시간관계상, 1996년 5월 그리스-로마 시대의 황금가면을 쓴 미라가 대거 발견된 인근의 고분(古墳)군락과 바하리야 국립공원 안에 있는 흑사막과 백사막의 놀라운 비경(秘境)을 감상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점이 짐짓 아쉬웠지만, 멀리 어둠속에서 환한 불빛을 드리우며 사막의 등대 역할을 해 주는 이슬람 모스크의 미나렛(Minaret, 첨탑)을 이정표 삼아 밤새도록 사막 길을 달리자, 새벽 무렵 시와 오아시스(Siwa Oasis)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집트와 리비아의 국경에 위치한 시와 오아시스는, 이집트에 있는 다섯 개의 주요 오아시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신탁 신전(The Temple of the Oracle)’이 있는 곳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리비아 국경에서 48㎞, 지중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260㎞ 지점에 위치한 분지(盆地) 형태의 시와 오아시스는,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사막과 수많은 소금 호수를 비롯하여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아름드리 대추야자나무와 올리브 숲으로 인한 철저히 폐쇄된 환경 덕택인지, 비교적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랫동안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왔다.

서서히 오아시스 마을 중심가에 진입하자, 모슬렘 농부들은 날렵한 몸짓으로 트럭에서 뛰어내리더니, 순식간에 도로변 한쪽에다가 엉성한 이동천막 한 채를 세웠다. 모래바닥에 기둥만 몇 개 세우고 넝마조각으로 차일을 두른 이동천막이 완성되자, 모슬렘 농부들은 곧장 플라스틱 병에 담아 온 오아시스의 샘물로 얼굴과 손을 말끔히 휑구고 나더니, 모스크의 미나렛을 향하여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난 모슬렘 농부들은 트럭에 잡화(雜貨)를 싣고 사막지역을 돌아다니는 아랍상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서둘러 파뿌리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그런데 밤새 도록 찬이슬을 잔뜩 맞은 파뿌리에서 진흙을 털어내고 크기별로 분류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한마디로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사막의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시린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면서 부지런히 파를 분류하는 작업에 동참하다가, 모슬렘 농부들과 함께 모래벌판에 일렬로 나란히 허리를 펴고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한 시간 남짓 명상을 하고나자, 그동안 체내에 누적되었던 피로가 말끔히 풀리며 온 몸과 마음이 동시에 상쾌해졌다.

▲ 사막의 등대 미나렛(왼쪽)과 이동 천막 속의 모슬렘 농부. ⓒ수해
모닥불을 활활 지펴놓고 화덕에서 갓 구워낸 에이쉬 빵과 커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자, 모슬렘 농부들은 도로변의 노천카페에서 아까부터 물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랍상인과 만나 흥정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시와 타운(Siwa Town)북쪽에 있는 게벨 엘-마우타(Gebel al-Mawta, 죽음의 산)를 향해 떠났다.

선천적으로 타인을 향한 친절과 배려가 몸에 훈습되어 있는 모슬렘 농부들이 비상식량을 담아서 건네준 작은 넝마 자루를 어깨에 둘러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파른 바위산 언덕으로 올라가,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가 누워있는 형상을 한 시와 오아시스의 전체적인 지형을 살펴보았다. 일 년 내내 거의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도시 구석구석에서는 수많은 우물에서 맑은 샘물이 콸콸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아시스의 샘물이 넘쳐흐르는 대형 수로 옆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나는 크고 작은 광천(鑛泉)과 소금호수가 즐비하게 산재해 있었다.

게벨 엘 마우타는, 옛적부터 시와 오아시스 지역 주민들의 공동묘지이자 에메랄드 원석이 생산되는 광산이었다. 그런데 1940년부터 이집트 고고학자 아흐마드 파크리의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이곳에는, 뜻밖에도 고대 이집트 말기 왕조 시대부터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분이 다량 분포되어 있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 안내인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고대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풍의 복식을 한 무덤 주인 가족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시-아문 무덤(Tomb of Si-Amun)속으로 들어가 무덤 내부의 벽화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장품 가운데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문서가 다량 발견되어, 당시의 상업과 무역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시-아문의 무덤을 샅샅이 살펴보고 밖으로 나와 드넓은 공동묘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탈리아군이 시와를 공격할 때 방공호로 사용하였기 때문인지, 군데군데 포탄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대부분의 고분은 심한 훼손을 입고 있었다.

▲ 게벨 엘 마우타(죽음의 산). ⓒ수해
정상에 서면 시와 호수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탁 트인 전망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게벨 엘 마우타 언덕에서 내려와, 한동안 울창한 올리브 농원과 대추야자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정처 없이 걸어가다가 보니, 불현듯 춤을 추고 싶어졌다.

내가 아무리 종교와 국경을 모두 초월한 ‘세계시민주의자’를 표방하며 순수한 여행자의 관점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승복(僧服)이라는 특정의 외피(外皮)를 걸친 상태에서 진행해나가고 있는 순례는, 본의 아니게 필요이상 건조하고 딱딱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늘 ‘실크로드 문화기행’이니 ‘세계철학기행’이니 하는 무거운 주제를 잔뜩 갖다 붙이고, 철저히 목적의식에 따라서 움직이는 여행은 결코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인적 그친 이 오아시스 마을의 외딴 숲길에서 아무도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고 하는데서 오는 안도감은, 그동안 승복이라는 카테고리(Category, 범주)속에 규정시켜 놓았던 내 영혼의 경직된 근육에, 한꺼번에 ‘감성’이라는 이름의 싱그러운 모르핀 주사를 대량 흡입시켜 주었다. 옳커니, 기회는 이때다. 신명을 다 바쳐서 온몸으로 춤을 추자.

양손에 잎사귀가 무성한 올리브나무 가지를 하나씩 주워들고, 맹목적인 자기도취에 빠져 같은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며 빙글빙글 맨발로 춤을 추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다 보니, 슬그머니 목이 말라왔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오아시스의 샘물을 찾아 나서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힘찬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얼른 주위를 살펴보니, 저 만치서 당나귀를 수레를 몰고 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 나만의 비밀스런 제례(祭禮)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찬물을 한 바가지 푹 뒤집어 쓴 것 처럼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다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에잇, 전혀 반갑지 않은 불청객 같으니라고.

▲ 당나귀 수레를 몰고 유적지를 안내하는 베르베르인 소년. ⓒ수해
고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가락을 따라서 흥얼거리며 천천히 당나귀를 몰고 오던 소년은, 냉랭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무표정하게 스쳐지나가는 나를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박장대소하고 웃기 시작했다.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배를 잡고 웃는 것 일까. 그냥 모른척하고 무시해버리고 지나쳐버리려다가, 아무래도 기분이 영 좋지 않기에 얼른 뒤쫓아 가서 다짜고짜 으름짱을 놓으며 물었다.
“하이,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웃는거지?”
여전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절반쯤 가린 채 폭소를 터트리던 베르베르인 소년은, 이윽고 웃기를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매우 명확한 영어발음으로 또박, 또박 말했다.
“하셉수트 여왕의 가짜 콧수염, 하하~.”
“뭐라고?”
아니, 이런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먼발치서 곁눈길로 슬쩍 바라보기만 해 놓고, 어떻게 내가 지금 햇볕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뒤집어 쓴 붉은 체크무늬 스카프 자락을 휘날리며, 모슬렘 농부로부터 빌려 입은 아랍전통복장에 가짜 콧수염을 달고,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사막 한가운데를 유유히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려 버렸단 말인가.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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