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주위에 성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에서 죄로 규정하는 온갖 종류의 성적 일탈이나, 연인 사이에서 늘상 화두가 되는 "오빠 믿지"의 통속이라든가, 길가에 채이도록 만연한 성매매와 포르노, 더 나아가선 차마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한 지난날의 성폭력 경험이라든가. 경중이 있겠으되 섣불리 내놓으면 상처받고 그렇다고 꽁꽁 싸매어두기엔 도저히 답답한 화두가 성이다. 알몸으로 다만 즐기기만 하면 되리라는 비위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생명을 잉태하는 고귀한 근원이라는 훈장 얘기에 그리 선뜻 동감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성의 '사회적' 층위가 활발하게 연구되면서 이 시대가 거둔 성취들이 있다. '젠더'의 문제의식 아래 성이 비로소 사회적으로 '논쟁 가능'한 형태가 됨에 따라 개인간의 치정과 성욕 문제로 치부되었던 성폭력들이 제 빛을 보게 되었고, 그 전에 노정되었던 많은 성적 억압들이 굴레를 벗어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성이란 보편적인 동시에 참으로 개별적인 것이며, 온전히 개인적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사회적일 리는 더더욱 없을 어떤 부분을 끝내 남긴다.

 ⓒ김용길
사람은 누구나 성 앞에서 외로워진다. 성적 일탈이든 연인에 대한 섹스의 강요이든, 사회적으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교양적 지침을 통과한 뒤에 남는 것은 결국 그 절벽같은 외로움을 어떻게 조섭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본래 처해 있는 존재 조건과 긴밀히 결탁해있다. 여기서는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새삼스럽지만 살면서 참 즐겨 잊게 되기 쉬운 그런.

"정녕 저는 죄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시편 51, 7)

옛날 사람에게도, 사람이 섹스로 태어난다는 건 얼마나 외상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섹스스럽지 않은 세계를 구상해내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생각했던 천국에는 확실히 섹스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그건 섹스가 더럽거나 금지되어야 해서라기보다, 그게 그만큼 무섭고, 골치 아프고,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을 알아간는 과정은 지도 없는 여행과도 같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성기가 앞으로 가게 됐고, 따라서 정상위가 가능하게 됐고, 직립보행을 하고서 부터는 앞몸을 애무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에 입 안의 속살이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게 입술이라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성이 생식이 아니라 쾌락으로도 전치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건이다. 섹스의 요소 가운데 "생육을 위한 번성"의 속성'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사람이면 누구든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제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한 쾌락은 아무데나 벗겨진 사람의 알몸만큼이나 도리없이 처연한 것이겠지만, 설령 그것이 고귀한 "생식"을 위한 행위라 할지라도 쾌락의 요소가 온전히 잠재워지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람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것이다. "저는 제 부모님의 쾌락 중에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외설스런 명제가 사실은 사람에게 가장 외상적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성교육이 곤혹스러워하는 가장 중요한 꼭지이자, 가정 단위의 신비로 어떻게든 윤색하려고 할 우리네 탄생설화쯤이기도 하리라. 그리고 어느 부모든 그런 기원을, 그들이 스스로 성을 알 때까지는 자식에게 숨기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네들도 대개 홀로 성을 알아왔거나, 자기가 어떻게 성을 알아오게 됐는지 반추하기 어려워할 테니까.

성을 알아간다는 것은 생식의 목적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매복해있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지도 없이 걸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처럼 성을 알아가는 건 어느 세대건 숨은 비의같은 거였을 것이다. 각자가 성을 알아갔던 과정들을 반추해보면 그리 즐겁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을 게다. 그건 결코 온전히 순결하거나 고귀해질 수 없는 사람의 육신에 대한 묵상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인간은 몸과 영을 함께 지닌 존재로 존엄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티 없는 세계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세상이 사정 후처럼 정갈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처럼 세균 하나 없는 천국의 관념론 아래엔, 거꾸로 모순덩어리인 섹슈얼리티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영과 육을 한 몸으로 아파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티 없는 신성과 음모 덮인 인성을 함께 고민하도록 태어난 존재들이 아닐까.

별이 멈추고 동방박사의 발이 멎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마굿간 바로 옆 칸에는, 샅처럼 축축하고 처연한 한 귀퉁이 속에 나귀들이 교미를 하거나 수태를 하며, 포유류의 운명을 서로 곁눈질하고 쓰다듬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 스스로 한 궁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한 나라의 중심인 수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지방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융(C.G.Jung)은 우리 자신은 하느님이 탄생하시고자 하는 하나의 마구간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과 같이 매우 지저분하다. 우리 스스로는 하느님께 보여드릴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안셀름 그륀/마인라드 두프너,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1999), 28-29쪽)

우리가 각자 존엄한 것은, 우리가 온전히 영적이고 고귀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애초에 영과 육을 함께 고민하도록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평등하다. 자신의 성이 절벽같이 아득할 때, 누구라도 당신과 함께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주었으면 좋겠다. 일견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외로움도, 기실은 아주 작은 마음 타래 하나 푸는 데에서 누그러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김대현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노래하고 사진찍고 잡지 표지디자인 만지는 일을 좋아한다. 각 세대의 상식을 다른 세대에 번역해주고 이해의 끈을 잇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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