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선교일기]

오지에서 외방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서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은 분명 선교지에 도착한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현실이다. 가난은 선교사의 삶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큰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가난 안에 살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섬기는 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교라는 큰 그림의 한 부분이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각지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먹이고 가르치고 아픈 이를 돌보는 것 같은 직접적인 의미 말이다. 선교사들은 이런 프로그램으로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서 생존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볼리비아에서 하는 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수많은 도움의 손길 속에서도 그들의 가난한 삶은 끝나지 않는다.

▲ 행상하는 여인 ⓒ이윤주
나는 지금 가난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얼마나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글에서 나누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내가 얻은 긍정적인 경험들이다.

‘가난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게 들린다. 나도 선교지에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려 하고 우리는 그것을 도우려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경험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하루 한 끼 밥상을 위해 종일 고되게 일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행복과 만족 누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도시 외곽의 한 마을로, 형편이 더 어려운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다. 날마다 그들의 고된 삶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 안에서도 충만한 행복과 기쁨이 보인다는 것이다. 당연히 고된 삶 속에서도 기쁨의 순간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이란 간간이 느끼는 짧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다. 그들의 가난한 삶에서 느껴지는 전반적인 감정은 고통보다는 행복과 만족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이웃들이 물질적인 가난함을 즐긴다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루 한 끼 뿐인 밥상에 올릴 음식을 마련하려 종일 고되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행복해 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이런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만족감을 느낄까. 미안하지만 내게는 비참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 삶의 모습이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이 안 어디에 희망을 두는 걸까. 나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질문들을 수없이 던졌었다. 어리석게도 그것은, 내가 가진 기준에 그들의 삶을 대어보고 맞지 않는다며 좌절하는 나의 모습일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나 물질적인 안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단순함, 그리고 불확실성 속의 충만함

이곳의 내 이웃들은 인생을 그다지 복잡하게 보는 것 같지 않다. 적어도 나를 비롯해 나와 비슷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면 더 확연히 보인다. 멋있는 말로 그 이유를 대자면 단순한 삶이 가지는 아름다움일 테고, 좀 더 현실적으로 이해하자면 가난한 삶이 주는 불확실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건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그들이 하루하루의 삶을 충만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된 삶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들만큼 충만하게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말이 그들의 가난한 삶을 낮추어 보고 조롱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그들의 가난을 미화할 이유도 멸시할 이유도 없으니 나는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할 뿐이다.

시장 바닥에 보자기를 펼쳐 놓고 한 줌 밖에 안 되는 마늘이나 브로콜리 몇 송이를 파는 여인이 있다. 많지도 않은 야채 몇 가지를 하루 종일 뙤약볕에 앉아 팔고 있다. 가진 물건이 워낙 적어 하루 가진 것을 다 팔아도 네 식구가 겨우 한 끼를 먹는다기에, 물건을 다양한 종류로 조금 더 받아다 팔아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인은 안스러워 하는 나를 오히려 안스러워 하며, “우린 괜찮은데…”라고 한다. 오늘 가진 것만 다 팔고 집에 들어가 다같이 저녁 한 끼 먹는 것이면 됐다고 했다. 조금 더 받아다 조금 더 팔아서 조금 더 돈을 벌려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 갑자기 여인의 소박한 만족을 망치는 천박한 제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만족했고, 그것만으로도 삶이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 언제나 밝고 환한 벨렌 ⓒ이윤주
생업 전선에 나선 열여섯 살 벨렌에게 희망과 긍정을 배워

우리 동네에 벨렌이라고 하는 열여섯 살 여자 아이가 있다. 언제나 기쁘고 삶에 대한 호기심과 활기로 가득 차 있어서 어린 나이에 그렇게 힘든 삶을 살거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볼리비아의 다른 많은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벨렌도 할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셋이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살기가 어려워 오래 전 아버지는 멀리 스페인으로, 어머니는 이웃 나라인 브라질로 돈을 벌러 갔다. 그래서 벨렌과 남동생은 부모님 없이 할머니 손에 자랐고, 너무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부모님은 이제는 낯설기만 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에게서 부쳐오는 얼마 안 되는 돈마저 뜸해지고 소식도 가물가물해 지면서 세 사람을 위해 열여섯 살 벨렌이 생업 전선에 나섰다. 주중에는 학교에 다니고 주말에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남동생을 돌보고, 집안 살림에다, 간간이 들어오는 작은 일거리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사정은 벨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가정의 아이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유난히 벨렌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남는 이유는 이 아이처럼 날마다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그야말로 사는 것이 ‘좋아 죽겠는’ 사람을 전에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벨렌은 쉴 새 없이 일하느라 바쁘면서도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 수다 떨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바탕 풀어놓고 가는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그 아이의 꿈이 가득 들어 있다. 이런 것도 하고 싶고, 저런 것도 배울 생각이고, 이 사람도 만나보고 싶고, 또 저런 곳에도 가볼 생각이다. 피곤하고 힘들고 외롭지만 그 고단한 삶을 고통스러워하기 보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희망이 있어서 일까.

가난한 이웃들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보며 이렇게 큰 하느님의 선물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가져도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삶, 안락하고 나태하게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삶들을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가난하고 힘들지만 스스로가 괜찮은 삶이라 여기는 긍정적인 태도야말로 가지기 쉽지 않은 축복이며, 희망이라는 또 하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는 길이리라.

가난하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사니 도와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소박함에 만족할 줄 아는 여인이나 삶의 희망에 넘치는 벨렌과 같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그런 얄팍한 질문을 넘어서는 건강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건강한 에너지는 전염성이 강해 많은 사람에게 옮겨질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것이 기쁠 뿐이다. 
 

이윤주 수녀 (메리놀 수녀회, 볼리비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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