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오늘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 출신 젊은이로서 사실은,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이 예수님 안에 이해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기 위해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당당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모세의 법(신명 22,22-24)을 내세워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여인아, 그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느님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빙자하여 사람을 단죄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당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마태오복음서는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태 7,3)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일관성이 없고 단편적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웃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요한복음서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이 흐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어떤 ‘빛’인지를 알리기 위해 집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1,9)고 이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미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 지킬 것을 강요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알리는 성전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데, 유대교는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기 위한 삶의 지침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하느님이 가차없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최초의 법전(法典)이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 시대에 집필된 법전입니다. 그 법전이 법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상대가 잘못한 그만큼 그에게 앙갚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가 제정하는 법들은 함무라비의 것보다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에는 동태복수의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 각자가 잘못한 이에게 직접 복수하는 대신 국가공권력이 잘못한 이를 잘못한 그만큼 벌을 주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예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그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벌주며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가르침으로 보여주신 하느님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신앙인이 그 빛을 받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으로 삶을 보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2).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산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단죄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인과응보가 요구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순환(惡循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사회의 질서 따라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財物)을 좋아하고,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합니다. 우리는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것은 동물세계가 지닌 질서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직관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 사는 동물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하느님의 질서, 곧 자비와 용서의 질서 안에 살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악,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복수의 악을 모르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악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자유로우십니다. 그 자유를 배워 살라는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집에서 그분의 율법을 빙자하여 그들 안에 있는 악을 순환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로 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잃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고 신앙인이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여, 인류 안에 자리 잡은 악의 순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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