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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바티칸의 검찰에서 사목자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제2차 바티칸공의회, 잃어버린 30년-③]
한상봉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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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12  10: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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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에 따라서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추기경회의인 '콘클라베'가 오늘(12일)부터 시작된다. 빠르면 사나흘 뒤에, 늦어도 열흘 전에 새 교황이 확정될 것이다. 바티칸의 소식통들은 뚜렷한 교황 후보가 없어서 다소 시일이 걸릴 수 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차기 교황은 전임 교황에 의해 어느 정도 부각되곤 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전임이던 요한 23세 교황의 ‘절친’이었으며 바티칸 국무성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사목적 교황이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가장 많이 공감하면서 신앙교리성 장관을 역임했다. 그들은 교회질서를 전통과 규율에 따라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어부 베드로가 아니라 지식인 바오로
세속주의를 경계하며 열정적으로 교황 자리 지켜

   
▲ 사진출처/ 유튜브 Profecia de Malaquias se cumple al Renunciar el Papa Benedicto XVI - Fin Del Mundo 갈무리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5년 즉위미사 강론에서 ‘신이 없는 인간 사회’를 탄식하고 세속주의를 경고하면서 지난 8년간 노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교황좌를 지켰다. 그는 교회의 뼈대를 전통 위에 다시 세우기 위해 2008년에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고, 2009년에 ‘사제의 해’를, 2012년에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바오로 사도’와 ‘사제’라는 키워드는 베네딕토 교황의 사목방향을 잘 보여준다. 유럽 중심의 그리스도교를 재건하고 싶은 열망은 이슬람국가인 터키를 유럽연합에 포함시키는데 반대했던 교황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유럽의 현대신학자인 칼 라너와 정치신학자 메츠 등의 영향을 받아 제3세계에서 풍미했던 상황신학을 단죄하고,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을 단죄해 온 교황의 태도에서도 유럽 중심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베네틱토 교황은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해방신학, 아시아에서 발생한 다원주의 종교신학, 미국에서 유행하던 여성신학 등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갈릴래아의 어부 베드로보다 로마제국에 속한 지식인이었던 바오로가 학자였던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한편 베네딕토 교황은 세속화에 대한 대척점에 사제를 놓았다. 베네딕토 교황은 대담집 <세상의 빛>에서 “사제의 해는 온갖 고난과 끔찍함을 무릅쓰고 유일무이한 사제직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게 재직기간 동안 미국과 아일랜드 등 서구교회 사방에서 사제를 둘러싼 성추문 사건이 터지면서 사제들의 위상은 추락했다. 이 실망감을 교황은 <세상의 빛>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악마가 사제의 해를 참고 볼 수 없어서 우리 얼굴에 오물을 내던진 것 같다. 마치 다른 사람들도 아닌 사제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더러움이 많은지 세상에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한편 베네딕토 교황은 자신의 세 번째 회칙이자 첫 번째 사회회칙인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발표해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사랑의 사회적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교황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사랑은 밝게 드러나고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고 전하면서,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상호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를 박탈하는 감성주의에서 사랑을 해방시켜 주고, 사랑으로부터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여유를 빼앗아 버리는 신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원칙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포함해 현대세계를 세속화시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며, 교회 역시 여기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는데 전념했다.

독일과 폴란드 교회는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유럽 중심적 사고는 마찬가지였다. 보이티야 추기경(훗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폴란드에서 경험한 것과 달리 독일교회는 히틀러가 장악한 제3제국에서 생존을 위해 나치에 대부분 동조했다. 제국종교협약에 따라 독일교회는 정부로부터 종교세 수입을 보장받았는데, 이를 통해 신자들의 자발적 헌금에 의존해야 하는 프랑스 등 다른 교회에 비해 탄탄한 재정구조를 지닐 수 있었다. 그래서 독일교회는 가톨릭대중의 의사를 존중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독일교회의 돈은 독일교회 주교들이 바티칸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된 원천이었다. 바티칸에 가장 많은 재정적 후원을 하던 미국교회는 회계보고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교황청을 위해 순순히 수백만 달러를 내놓았지만, 독일주교들은 달랐다. 독일 쾰른의 요셉 회프너 추기경은 1987년 선종할 때까지 바티칸의 재정을 관장했다. 한편 독일교회는 아드베니아트(Adveniat)와 미제레올(Mesereor) 등의 해외지원단체를 통해 제3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튀빙겐 대학 교수 시절, 독일 학생들의 좌경화에  반(反) 자유주의자의 길 걸어

   
▲ 사진출처/ 유튜브 La historia de la vocación de Joseph Ratzinger 갈무리
회프너 추기경의 사상적 동반자였던 라칭거가 1981년 신앙교리성 장관에 취임하면서 신앙교리성은 신학자 감시기능을 강화시켰다. ‘교황의 사람’이라고 불리던 라칭거는 바티칸의 핵심 규율가로서, 그에 견줄만한 사람은 바티칸에 국무성의 카사롤리 추기경밖에 없었다. 라칭거는 교황청의 견해에 반대하는 주교, 신학자, 수녀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는데, 늘 예의바르고 정중한 태도를 취했으나 학자다운 집요함이 있었다.

라칭거가 처음부터 보수적인 신학자는 아니었다.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쾰른의 요셉 프링스 추기경에게 신학적 조언을 수행했는데, 프링스는 당시 신앙교리성을 “현대세계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전 세계인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법과 행태를 고수하는 기관”이라 말해 동료 주교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처럼 라칭거는 뮌헨의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의 신학적 조언자였던 칼 라너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지지했다. 라칭거는 학자로서 훗날 자신이 징계를 내려야 했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스승이었는데, 당시 이렇게 말했다.

“예언의 의미는 미래를 앞서 말한다기보다는 제도의 독선, 즉 도덕을 전례로, 회개를 형식적인 의식으로 대체하는 독선에 대한 예언자적 항의에 있는 것입니다. 전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하느님은 제도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의 편에 서셨습니다.”

페니 러녹스는 <로마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라칭거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학생시위가 독일대학을 휩쓸면서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튀빙겐 대학 교수였던 라칭거는 좀더 자유주의적인 교수였던 한스 큉 때문이 마음이 다치기도 했다. 한스 큉은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시작한 개혁을 더욱 밀고 나갈 것을 원했지만, 보다 신중하고 덜 공상적이었던 라칭거는 주저했다. 게다가 독설가였던 큉은 반쯤 빈 라칭거의 강의실과 초만원을 이룬 자신의 강의실을 비교하며 학생들 앞에서 자주 라칭거를 비웃었다. 고립감을 느낀 라칭거는 결국 퇴빙겐을 떠나 고향인 바바리아로 돌아갔다. 그의 송별식에서 한 동료 교수가 <사탄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라칭거는 훗날 이 일을 “나는 다시 한 번 자유주의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라칭거는 뮌헨의 추기경으로 있으면서 1979년에 열린 주교대의원회의에서 보이티야 추기경을 만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논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지나친 개혁조치’를 바로잡아 교회 안에 질서를 회복할 필요가 있음에 공감했다.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좌에 오르면서 라칭거가 신앙교리성 장관이 되었을 때, 로마의 현대판 종교재판소인 신앙교리성은 과거처럼 고문과 화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의 예언자적 활동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타락한 세상이 교회를 오염시켰다"고 믿었던 라칭거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수많은 신학자 심문, 자격박탈


라칭거는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상을 격퇴하는 곤봉을 쓰기도 했다. 그는 예전의 신앙교리성 장관들이 은밀하게 활동한 것과 달리, 관료이면서도 학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미덕을 발휘했다. 라칭거는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비토리오 메소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규율의 복원은 대단히 바람직스런 것”이라고 말했다.

타락한 세상이 교회를 오염시켰다고 믿었던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가 오염된 사회와 대화에 나서면서 점진적인 타락과정을 밟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교회 안에 스며든 자유주의는 ‘불길하고’ ‘파멸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평신도들은 사제들이 자신들을 보살필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여성들은 처녀와 어머니로서 자신의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며 한탄했고 “미국교회는 돈과 소비를 모든 것의 척도로 삼는 사회에 굴복했으며, 제3세계 교회들은 정치적 해방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다.

   
▲ 사진출처/ 유튜브 Immortalità dell'anima e il plato­nismo. Ammissioni di Joseph Ratzinger 갈무리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은 라칭거의 무시무시한 진단을 반박했다. 쾨니히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명백한 성령의 역사”였으며, “복고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가 사회를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라칭거의 숙적이었던 한스 큉은 라칭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판관처럼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라칭거는 교회가 안전지대로 후퇴하길 원했다. 공의회 이전의 ‘요새로서의 교회’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종교단체로 선택한 것은 ‘친교와 해방’과 같은 전투적인 그룹이었다. 이들은 교계제도에 전적으로 복종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법률이 모두 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해야 된다고 여겼다.

라칭거가 교회의 충실한 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그가 섬긴 교회의 종류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하느님의 백성’의 자치적이고 민주적인 교회를 지지했던 반면 라칭거의 종교적 확신은 단지 바티칸의 권력을 신성화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는 바티칸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신학자들에 대한 라칭거의 강경한 조치로 드러났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시절에 가장 먼저 신앙교리성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은 프랑스 도미니코회 수사 자크 포이허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잃었으며 대중강연을 금지 당했다. 그 다음은 튀팅겐 대학의 한스 큉인데 큉은 교황의 무류성에 문제를 제기 했으며,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심문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한스 큉은 ‘교리 모독죄’로 가톨릭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박탈당했다.

벨기에 출신의 네덜란드 신학자 쉴레벡스(Edward schillebeeckx)는 그의 저술에 프로테스탄트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신앙교리성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남자든 여자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성직자를 선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수석대주교였던 빌러브란트 추기경은 쉴레벡스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에 대한 고발은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교회에 대한 고발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쉴레벡스를 변호했다. 로마의 심문을 받고도 쉴레벡스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아서 1986년에 다시 신앙교리성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윤리학자 찰스 커랜이 워싱턴 가톨릭대학에서 교수권을 박탈당했고, 해방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엘살바도르의 혼 소브리노도 조사를 받았고,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는 로마의 심문을 받고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바티칸은 이들 신학자들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었다. 신앙교리성은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구티누스는 “로마가 견해를 밝히면 결론이 난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1980년대에 사람들은 “그것은 로마의 견해다”라고 말한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속'이 아니라 '대화'

라칭거가 2005년 베네딕토 16세로 교황이 되었을 때, 자신의 염려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휩싸인 교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013년 베네딕토 교황은 사임을 표명한 이후 마지막 일반 알현에서 지난 8년간의 여정을 되살피며 “기쁨과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쉽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며 “교회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통과하는 한 척의 배와 같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배가 가라앉도록 두시진 않는다”고 말했다.

   
▲ 사진출처/ 유튜브 Joseph Ratzinger, un sacerdote frente a la mentira nazi 갈무리
그중에서도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문제는 교황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범죄”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으며, 일부에선 교황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교황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고 성추문 사건을 다루는 지침도 내놓았지만, 해당 사제들에 대한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약속은 많이 했지만 실행에 옮긴 것은 없는 교황”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아마 이 사건은 스스로 엄격했으며 교회를 세속주의로부터 단속하려 했던 교황의 입장에서 가장 큰 심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에 교황청 신앙교리성(장관 윌리엄 조셉 레바다 추기경)은 아동성추행 등 교회법의 위반 사안을 다루는 <더욱 중대한 범죄에 관한 규범(Norme de gravioribus delictis)>을 2010년 7월 15일 발표했다.

한편 이 규범에서는 여성사제 서품을 아동성추행과 더불어 '더욱 중대한 범죄'에 포함시킴으로써, 지역교회에서 여성을 사제로 서품하려고 할 경우에, 해당 성직자는 성직을 박탈당하며, 대상 여성은 '자동 파문'된다고 밝혔다. 이 내용은 2008년 5월 29일자로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여성 서품을 시도하는 범죄에 관한 일반 교령>이 맥락을 다른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여전히 여성사제 서품회의 등 여성사제운동이 번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성사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지난 2012년 겨울 대통령선거 기간에 가장 많이 등장한 구호 중 하나는 ‘소통’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기간 내내 한국사회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으로 일어난 촛불집회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광화문 길목을 막은 ‘명박산성’을 ‘불통’의 상징처럼 이야기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막다른 길에서 ‘사임’을 표명했다. 연로한 교황은 현대세계의 다양한 요구들을 그저 막을 수만도 없었고, 수용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 해결을 후임 교황에게 넘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교황이다. 교회가 복음적 원천으로 돌아가고 신자들이 영적 확신 안에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속’이 아니라 ‘대화’임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다시 가르쳐 주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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