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 셔츠 속에 껴입은 발열 내복이 답답하고 살갗이 스멀거리는 것이 수상쩍다 싶더니 앵두나무 우물가는커녕 노인정 쪽 발걸음이 외려 어울려 보일만 한 나인데도 마음은 주책없이 연분홍 치마를 날리기 시작한다. 어느 소설가는 ‘情은 늙지도 않아’ 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꿈은 늙지도 않아’ 라는 자탄을 하게 된다. 그것이 일장춘몽인지 호접지몽인지 알 바 없지만 어쨌든 봄의 기척만 느껴지면 어느새 또 나를 쑤석거려 집 밖으로 동네 밖으로 밀어내는 통에 도리 없이 운동화 끈을 여미고 돌아다닐 채비를 할 따름이다. 헌데 나의 그 춘몽이라는 것이 샤방샤방한 연애라도 꿈꾸는 것이라면 차라리 어느 시점에선가 한번 작정하고 사고를 쳤을 법도 한데, 알고 보면 꽤나 시시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거라 밝히기가 민망할 정도다.

 ⓒ구자명
그렇게 별 볼 일 없으면서도 봄마다 내 마음에 애드벌룬을 달아 정처 없이 떠다니게 하는 꿈이란 작고 조촐하고 기능적인 전원주택 한 채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지을 곳을 찾아 수도권 일대의 땅을 둘러보고 다닌 게 수년째다. 중년 이후로 아파트살이를 면치 못해온 도시생활자로서 그런 계획을 품을만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내 머릿속에 그려온 그 집은 사실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고 조촐하고 기능적인’ 이란 조건 속에 포함된 ‘기능적’이란 말이 함의하는 요소들이 상호모순적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를 침해 받지 않으면서 공동체적 유대가 원활해야 하고, 조용하면서 적적하지 않아야 하고, 연료가 적게 들면서 냉난방이 아주 잘 되어야 하고, 햇빛이 많이 들면서 굴속 같은 아늑함을 가져야 하고,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되 최대한 자연주의적 시설이어야 하고, 실내외 경관이 소박하면서 세련된 분위기여야 하는 등등, 리스트는 길게 이어진다.

바로 그 리스트의 비현실성으로 말미암아 내 꿈속의 전원주택은 그토록 오랫동안 꿈에 머물렀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게다가 봄철이 지나고 나면 그 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꽃처럼 시들어서 내 의식의 주름 속으로 슬그머니 스러져 버리곤 한다. 지난봄에도 남한강 부근에서 발품을 팔며 집터를 보러 다니다가 문득, 내가 왜 이 이상한 주기성 증상을 앓게 됐을까 의아해져 한참을 강가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온 적이 있다.

지상의 집 한칸, 의미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니, 나는 학창시절부터 시작해 수 십 곳의 집을 전전하며 남달리 긴 이사의 역사를 써왔구나 싶었다. 대학 시절 자취방 이사만 한 학기에 평균 한 번 이상으로 졸업 때까지 열 번도 넘게 다녔고 졸업 후 잠시 부모님 집에 돌아왔다가 결혼 전후로 다시 옮겨 다니길 무려 열 세 번이나 했으니 가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삿짐 꾸리다 볼 장 다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내 집 마련 이전까지 월세, 전세, 전전세 등 갖가지 형태의 임대를 거쳤고 내 집을 갖고 나서도 외국에 몇 년 나가 있는 바람에 다시 월세 집을 살았다. 허리를 90도 가까이 구부린 채 드나들어야 하는 부엌에다 범곤충전당대회가 무시로 열리는 화장실이 딸린 반지하 방에서도 살았고, 윗목에는 자리끼 물이 얼어붙는데 아랫목에 깐 요는 구멍이 나도록 타들어 가는 적산가옥에서도 살았다. 또 북태평양 바다를 파노라마 비전으로 감상할 수 있는 드넓은 창 밖으로 저녁이면 진홍빛 노을이 자지러지게 펼쳐지던 유럽식 아파트와 이따금 주당 남편이 취흥이 도도해서 창턱에 올라앉으면 내려올 때까지 떨면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당시 한국 최고층 아파트의 18층에서도 살았다.

지금은 43년 된 한국 최고령 아파트에서 부모님이 남겨두고 가신 것과 우리 것을 합친 살림살이의 과포화 상황을 요령껏 견디며 그럭저럭 지내고는 있으나 어찌 주거환경을 바꾸고픈 욕구가 없겠는가. 그래선지 이래저래 현실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가운데서도 내 의지대로 지은 나만의 작은 집을 꿈꾸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봄엔 본격적으로 춘몽의 유혹에 시달리기 전에 스스로 좀 묻고자 한다. 지상의 작은 집 한 칸…. 집이 없지도 않은, 아니 제법 번듯한 집을 이미 가지고 있는 자가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그 집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두어 해전 중국 섬서성에서 황하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원지대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황토고원 산등성이 여기저기서 굴집을 파고 사는 원주민들을 보았다. 그냥 흙벽을 뚫어 방 두어 칸을 넣고 입구에 조각보 이불을 늘어뜨려 문을 대신한 게 그들의 집이었다. 그래도 그 단순, 질박의 극치인 그 공간에 삼대가 오순도순 살면서 여행자들에게 자기네 주거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그들은 참 행복해 보였다. 정부에서 현대식 공동 주거를 마련해 줬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지상의 집 하나, 내가 새봄마다 꿈꾸며 터를 찾으러 다니는 그것도 혹시 그처럼 지극히 보잘것 없으면서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워낙 증세가 만성이라 해결이 그리 쉽사리 나겠느냐 싶지만, 요즘 들어 그 고원의 굴집들이 자꾸 떠오르는 걸 보면 뭔가 처방의 가닥이 잡힐 듯도 하다.

 
구자명 (임마꿀라타) 심리학을 전공했으나 소설 쓰기가 주업이고 이따금 부업으로 번역도 한다. 최근에는 동료 문인들과 함께 ‘문학적으로 자기 삶 돌아보기’를 위한 미니자서전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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