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내 직업을 얘기하면 언제나 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느냐?”는 것이다. 남성적인 나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탓도 있지만, 사람들에겐 약간 낯설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이쯤에서 내 직업을 얘기해야겠다. 나는 ‘백의의 천사’라고 불리는 간호사다. 즉, ‘남자 간호사’인 것이다.

▲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간호사 역을 맡았던 표인봉 (유투브 동영상 갈무리)

십여 년 전 방영됐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표인봉이 맡았던 역할을 기억해낸다면 느낌이 더 빠르게 올까? 예전보단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직업이 아니어서인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내 일에 대해 조목조목 캐묻곤 한다. 하지만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면 사람들은 금세 나를 이해하고 내 직업에 대해서도 공감해 준다. 내가 간호사라는 내 직업을 잘 설명해서도, 억지로 포장해 공감대를 형성해서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가 지금 이 직업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불만 가득했던 대학 생활의 전환점, 묵주반지룰 낀 중환자실 할머니와의 만남

사실 처음부터 간호사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자라면서 성적이나 가정환경에 맞추다 보니 내가 꿈꿔온 것과는 다른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춘이 이런 괴리감을 한 번쯤 느낄 듯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벽 말이다. 이 벽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일 듯하다. 그 벽 앞에서 주저앉아 그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잊고 지내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벽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려 노력하고 도전하든지.

처음에 나는 후자였다. 내가 왜 여자만 가득 찬 교실에 앉아 있는지, 내가 간호사가 되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심 투성 이였고 불만만 가득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겉돌던 내게 삶의 방황을 바꾼 계기가 찾아왔다.

대학교 2학년 실습 때의 일이다.
중환자실에서 살아 있는지 죽은지도 모르는 죽음의 경계선 같은 곳에서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낀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의식은 전혀 없었지만 닳고 닳은 묵주반지를 보니 어릴 적 항상 함께 성당에 가 주시던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나는 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무작정 기도를 올렸다. 한참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중환자실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학생. 간호사 다 됐네."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셨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는 이런 작은 기도도 간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순간 간호사의 매력에 빠졌고 간호사라는 직업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되었다. 만약 그때,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하고 뒷걸음치거나 자리에 주저앉았다면,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호스피스 간호사’라 새로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에 벽을 넘고자 발버둥을 쳤다면, 지금 나는 그 벽 앞에서 터를 잡고 새로운 울타리를 지은 셈이다.

'지금'에 충실할 때, 만날 지도 모를 '다른 길'

나는 종종 간호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는 후배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지금 이 직업이 마음에 드느냐고. 후배들은 하나같이 “아니오”라고 답한다. 이 직업을 선택한 건 ‘돈 때문’이거나 ‘성적에 맞추다 보니’라고 답한다. 후배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고 지금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두 가지를 하다 보니 너무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런 후배들을 보며 미래의 꿈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많은 사람을 돕는 일인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른 누군가가 그토록 꿈꾸던 자리인지를 아는 것도, 진심으로 지금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사랑해보려 했는지 되묻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이 이루고 싶은 다른 꿈을 이루고 나면 과연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며 살 것인지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꿈을 한 가지로 국한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꿈은 계속 생겨날 것이며 그게 바로 ‘청춘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를 잘 들여다봐야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지닌 가치를 발견 할 수 있으니 말이다. ‘Present’라는 단어에는 ‘현재’와 ‘선물’이라는 뜻이 있다. 즉, 현재가 선물이라는 것인데, 눈앞에 놓인 선물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배달 예정인 택배만 기다리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오늘 우리 앞에는 수많은 선물이 놓여 있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그만큼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충분히 잘해나가고 있으며 행복할 권리가 있고 수백, 수천 가지의 꿈을 꾸며 살아도 된다. 조금 더 지금의 자신들을 사랑해주자.<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카르페디엠!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 Seize the day)”
 

 

조대웅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남자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직업적 이미지와 달리 농구, 축구, 야구 등 거친 운동을 즐긴다. 술잔에 담긴 술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의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과 또 다른 만남의 장을 여는 소통으로 글을 쓰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려고 노력하는 보통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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