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도하는 민중 가수 박준 토마스

아이돌 가수에게나 어울릴 법한 헤드셋 마이크를 쓰고 통기타를 어깨에 멘 중년의 남자가 사람들 앞에 섰다. 무대도 따로 없다. 현수막이 걸린 담벼락 앞부터 바닥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까지가 곧 무대다. 남자는 등에 메고 온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그는 길을 들였는지, 타고났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딱 맞는 가열찬 목소리를 가졌다. 스스로를 ‘노래 일꾼’이라 소개하는 가수 박준. 2월 중순의 토요일, 어느 노동조합의 대의원대회에서 공연 순서를 기다리던 그를 만났다.

“노동가요 가수로 처음 무대에 섰던 건 1999년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이었어요. 첫 음반에 있던 노래 <세상을 멈춰라>와 <약속은 지킨다>, <깃발가> 이렇게 세 곡을 불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언제까지나 벼랑 끝에 내몰려 살 수는 없다. 기계에 매달려 살아온 가슴을 네 놈들이 아느냐.’ 극으로 치닫는 노래의 가사가 현장 노동자들의 가슴에 박혔던 것 같아요.”

▲ '노래 일꾼' 박준 씨가 밀양 송전탑 건설 중단 촉구 문화제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현진 기자

박준 씨는 첫 공연 후 일주일 동안 여러 투쟁 현장에 불려 다니며 노래를 하느라 몸무게가 7kg이나 빠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박준 씨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투쟁 현장의 요청으로 일주일 스케줄이 빡빡하다. 인터뷰를 앞두고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늘 ‘이동 중’이라던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에 3~4일은 늘 밖에 나가 있어요. 노동자들이 장기간 투쟁하는 사업장이 많은데다가 또 제가 가보고 싶은 투쟁 현장도 많거든요. 상황이 열악해서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하지 못하는 곳도 있어요. 그럴 때는 먼저 연락을 하고 기타 하나 메고 찾아가지요.”

“응어리진 답답함 풀어주는 게 문예인의 역할”
투쟁현장에서의 인기 비결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선곡 기준

그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 미리 선곡을 해두지 않는다.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을 앞두고 찾아가 현장의 ‘동지’들이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과 분위기를 살피면서 그 날 부를 노래를 정한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가 아닌, 함께 싸우는 동지가 되어 그들과 ‘호흡’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응어리진 답답함을 풀어주고 아직 마음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한 게 있다면 붙잡아서 끌어내주는 게 문예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센 노래’만 부르지는 않는다. 상대의 마음을 읽고 ‘강약’을 주는 것이 그만의 선곡 기준이다.

“2001년에 부평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옥쇄파업을 할 때였어요. 공연 요청을 받고 공장 담을 넘어 들어갔더니 후배가 저를 보고는 ‘선배님, 오늘은 노동가요 말고 하루 종일 뽕짝이나 부릅시다’하더라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죠. 한곡 정도 편하게 부르고나서 <나그네 설움>을 불렀어요. 그러자 노래를 듣던 노동자들이 하나 둘 울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거예요. 꼭 제 노래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살아온 세월과 설움이 뒤엉켜 밖으로 터져 나온 거죠.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 2012년 여름 대한문 앞에서 쌍용자동차 노조 김정우 지부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박준 씨. ⓒ한수진 기자

투쟁 현장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기 이전에 박준 씨는 명동성당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예수의 혁명가적 면모에 마음을 빼앗긴 심신 깊은 청년이었다. 1981년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에 소속된 전례연구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청년미사를 준비하고 미사가 시작되면 기타를 연주해 성가와 민중가요를 불렀다. 당시는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돼 부를 수 없던 시기였지만 성당 안에서는 파견성가로 <아침이슬>뿐만 아니라 <투사의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이른바 민중가요를 부르곤 했다. 박준 씨는 “미사 시간에 부르던 노래들이 청년들 사이에 끓어오르던 무언가를 토해내게 만드는 역할을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성만 열사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 때였다. 박준 씨는 매년 5월 조성만 열사의 추모미사에 참석해 미사 전례와 성가 반주를 맡는다. 그는 “성만이와 활동하는 단체가 달라 인사만 하는 정도였지만, 조성만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당시 명동에서 활동했던 청년들에게 평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과 머리로 기억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의 기억이 머리의 기억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에 박준 씨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거리에서 노래하는 일은 하느님이 ‘사제의 길’ 대신 주신 달란트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힘이 되길 기도해

“젊을 때 같이 활동하면서 세상의 누룩과 소금이 되자는 약속을 나눈 친구들을 보면 세월 속에 녹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늙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세상살이에 많이 지쳤는지 예전의 약속이 잊혀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죠. 우리가 갈구하는 참세상은 나이를 먹든 안 먹든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풍요만을 쫓는 게 아닌가 싶어요. 좁은 길로 가기 싫은 거죠. 저 역시도 그런 부분이 있고요.”

그는 자신도 좁은 길보다 큰 길을 선택하는 일이 더러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나의 삶 자체가 예수라는 양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 앞에서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요,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라고 여긴다.

“예수님을 믿는 운동선수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성호를 긋듯이 저는 노래하기 전에 성호를 그어요. 그리고 ‘제가 노래하고 이분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이분들에게 희망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해요. 바쁘게 무대에 올라야 할 때에는 기도를 못하기도 하지만 기도와 늘 함께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는 유아세례를 받고 성당활동을 열심히 한 젊은 남성들이 으레 한 번 쯤 꿈꾸는 사제의 길을 한동안 진지하게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명동성당 앞에서 백골단에게 사지가 들려 연행되는 여학생을 구하려다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얻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진 뒤로는 사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김수창 신부는 “살다보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달란트가 주어지게 된다”고 위로를 했다.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은 박준 씨는 “예수를 따르는 삶이 사제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추슬렀다.

▲ 2012년 5월 24일 예수회센타 성당에서 봉헌된 천주교 열사 추모 미사에서 박준(토마스) 씨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와 <편지>를 열사들의 영정 앞에 추모곡으로 바쳤다.ⓒ정현진 기자

1994년 도시빈민운동 음반을 계기로 민중 가수의 길 들어서
“한 곡을 불러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친구를 병문안 갔다가 우연히 만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하게 됐고 1985년에 모금함과 기타를 메고 거리에 나섰다. 그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곰인형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매주 한번 씩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 공연을 연 것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다 1994년에 도시빈민운동 음반 <시작의 노래>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민중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거다.

“80년대부터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쭉 노래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투쟁현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노래를 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노동가요가 참 좋아요. 가식이 없고 은유도 없고, 참 직선적이잖아요. 현장에서 만나는 노동자 동지들과 닮았어요. 그래서 때로는 기운이 없는 동지들을 만났을 때 살짝 호통을 치기도 해요. ‘여러분들이 진실인데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저는 노래 한 곡을 불러도 같이 호흡하고 싶거든요. 그렇게 노래하다보니 더욱 얼굴에 철판을 깔게 된 거죠. 그럴수록 많이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첫 마음을요.”

지금도 매주 월요일 저녁 삼종기도가 끝날 즈음이면 명동성당 앞에서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노동자의 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들불장학회’ 모금 공연이 명동성당 담벼락 앞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부평 대우자동차 해고 투쟁 당시 노동자의 부인과 아이들이 분유 값이 없을 정도로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보고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혼자 기타를 들고 명동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져 왔다. “왜 주변에 말도 안하고 혼자 청승을 떠냐”며 찾아온 후배들이 함께 자리를 지켜준 것이 오랜 시간 노래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박준 씨는 말했다. 그와 함께 노래하는 이들, 그의 노래에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길을 따르는 ‘노래 일꾼’ 박준 씨의 동지들이다. 2013년 2월 서울 한복판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예수를 만났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