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11]

 별을 따라서 사하라 사막을 유랑하는 목동들과 함께 어울려 이집트 서부 오아시스 지역을 차례로 둘러보려던 나의 계획은, 사진을 찍기 위해 히비스 신전 본채의 두터운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졸지에 그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고장 난 카메라를 수리하기 위하여 일단 아라비아 사막으로 소금을 실으러 떠나는 아랍상인들의 트럭을 타고, 룩소르 시내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고장 난 카메라는 사흘이나 걸려서 간신히 고쳐졌다. 하는 수 없이 궤도를 약간 수정하여 룩소르에서 바하리야 오아시스(Bahariya Oasis)에 이르는 구간은 열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티켓을 예매해놓고 한밤중에 출발하는 카이로행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에 이르는 나일 강 동쪽 지역을 다시 걸어 보았다.

그 옛날, 해마다 오페트 축제가 시작되면 수많은 인파가 달려나와 꽃을 바치고 향수를 뿌리며 풍년을 노래하던 테베의 동쪽 강변에는, 지금은 도중에서 끊겨 버렸지만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이어주는 ‘참배의 길’을 따라,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한 600여 기의 안드로 스핑크스가 두 줄로 나란히 도열하고 있었다.

황금으로 치장한 테베의 신상(神像)을 실은 배 모양의 신여(神輿, 성스러운 가마)가 카르나크 신전을 출발하여 룩소르 신전에 이르는 참배의 길을 따라가는 동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테베의 주신(主神) 아몬과 현세의 통치자인 파라오가 곧 일체자임을 백성의 뇌리에 강렬하게 주입시키던 고대 오페트 축제의 전통은 지금도 면면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 룩소르 신전 정문 앞에 서 있는 청동 오벨리스크. ⓒ수해

원래 카르나크 대신전의 부속신전으로 ‘아몬의 남쪽 궁전’이라고 불렸던 룩소르 신전은, 신왕국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아몬 신의 여름별장으로 오페트 축제 때만 사용하기 위해 지은 소규모의 신전이었다. 그러나, 그 후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를 비롯한 역대 이집트 파라오들이 자신의 통치철학을 반영하여 증축을 거듭한 결과,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복합적인 신전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입구에서 지성소까지의 길이가 260m나 되는 룩소르 신전은, 모든 건물이 나일 강과 남북으로 나란히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 좌우를 자세히 살펴보니, 우람한 파피루스 기둥들이 도열해 있는 첫 번째 안마당부터 매우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안마당 왼쪽에는 13세기 무렵의 이슬람 성자 아부 알 하자지(Abu-al Haggag)를 위해 건립해 놓은 모스크가 있고, 오른쪽에는 람세스 2세가 세운 오페크 축제 때 사용하던 성스러운 배를 안치해 두었던 성주사당(聖舟祠堂)이 있다. 성주사당과 제2탑문을 지나서 투탄카멘(Tutankhamen, BC 1334~1325년 재위)때 새겨놓은 아름다운 오페트 축제의 모습이 돋보이는 대열주실의 파피루스 기둥 숲을 지나면, 아멘호테프 3세가 만든 64개의 활짝 핀 연꽃 모양의 파피루스 기둥이 삼면을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안마당에 이어, 32개의 기둥이 서 있는 소열주실이 나타난다.

소열주실 안쪽에는 두 개의 전실이 있는데, 놀랍게도 4세기 무렵 콥트교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전실의 천정에는, 이집트 벽화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의 모습을 담은 기독교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한동안 이집트의 전통 신을 모시기 위해 건립된 신전 안에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콥트교의 자취를 찾아 성지순례를 나선 기독교 순례자들이 부르는 찬송가와 모슬렘 순례자들이 독송하는 꾸란 소리가 어우러져 기묘한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빚어내는 룩소르 신전의 독특한 이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다시 강변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측면에 있는 정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직도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신전 앞의 공터로 나가 정문을 똑바로 바라보자, 넓이 65m에 높이 25m의 제1탑문에는 람세스 2세의 좌상 2개와 분홍색 화강암으로 조성해 놓은 우람한 오벨리스크 한 기가 우뚝 서 있었다.

석재파편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신전 앞의 공터를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왼쪽 탑문 앞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니, 높이 23m에 무게 230t의 거대한 청동 오벨리스크 위로, 또 한 기의 오벨리스크가 슬그머니 클로즈 업(Close-up)되기 시작했다.

▲ 파리 콩코드 광장에 서 있는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수해

고대에 ‘태양이 뜨고 지는 지평선’이라고 불렀던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는, 원래 룩소르 신전 제1탑문 좌우에 두 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1831년 당시 이집트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805~1848)가 그 중 하나를 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Louis-Philippe I, 1830년~1848년 재위)에게 선물로 보냈다. 때문에 룩소르 신전 정문 오른쪽에 서 있던 오벨리스크는, 현재 파리 샹젤리제 거리 동쪽 ‘콩코드 광장(Concorde Place)’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운반하여, 그것을 ‘화합과 조화’를 상징하는 콩코드 광장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는데 소요된 시간만 하더라도 꼬박 5년이 걸렸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최초의 시립미술관 카르나발레 미술관(Carnavalet Museum)에 전시되어 있는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1836년 10월 25일 콩코드 광장의 룩소르 오벨리스크의 설치’라는 제목의 유화(油畵)에 보면, 기둥에 람세스 2세의 공적을 칭송하는 1,600자의 상형문자가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는 이 우람한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장면이 박진감 넘치는 터치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리용 출신의 사업가에 의해 건립된 ‘기메 아시아 미술관(Guimet Museum of Asian Art)’에 소장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와 중국 둔황으로부터 밀반출해온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의 실크로드 컬렉션을 관람하러 가는 길에, 어디선가 우울한 샹송이 하염없이 들려오는 파리의 안개 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떠올리면
서, 원래 그것과 함께 나란히 서 있던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바라보고 서 있자니, 새삼스럽게 만감이 교차하였다.

한동안 룩소르 신전 뜨락을 거닐면서, 선물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전리품(戰利品)이 되어 세계각지로 흩어져나간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수난사에 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다가, 룩소르 역으로 향했다.

▲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완행열차의 객실벽화와(왼쪽) 아마르나의 여인들(오른쪽) ⓒ수해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허름한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나일 강 하류 지역을 향해 달려가노라니, 이따금 구슬픈 기적 소리를 울리며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달려가던 열차는, 어느덧 하토르 여신 숭배 중심지인 덴데라(Dendera)와 오시리스 신앙의 중심지인 아비도스(Abydos)를 지나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룩소르와 카이로 중간 지점의 나일 강 동쪽 기슭에 있는 아마르나는, 1887년 한 농촌 아낙네가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새긴 점토판서(粘土板書)인 ‘아마르나 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삽시간에 전 세계 고고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곳이자,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 BC 1350~1334년 재위)에 의해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던 의미심장한 장소이다.

아멘호테프 3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멘호테프 4세는, 다신교(多神敎)를 신봉했던 그의 부왕에 의해 테베의 수호신 아몬에게 제사 지내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비대해지자, 오랜 번민과 치밀한 계획하에 다신교인 이집트 종래의 종교를 금지하고, 아텐(Aten,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만을 유일신(唯一神)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一神敎)사상을 도입했다. 또한 아몬 신과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수도를 테베에서 지금의 아마르나 지역으로 천도(遷都)하고, 아마르나에 ‘아케타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부여하면서, 스스로 태양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태양이 빛을 비출 때 풀밭에 있는 새들은 행복하고, 나무와 풀들은 푸르게 자라나네.
모든 동물 무리가 노닐고 모든 새가 활동을 시작한 까닭은, 태양이 솟았기 때문이네.
강을 헤엄치는 물고기도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고, 태양은 기뻐하기 위해 땅을 찾았네.
태양은 인간과 소떼, 새의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미물마저도, 모두 창조했다네.

▲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을 지나, 아마르나 유적지로 가는 길. ⓒ수해

열차 안에서 만난 아마르나의 여인들이 부르는 태양신에게 바치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흙먼지로 얼룩진 차창 너머로 다채롭게 변해가는 철길 주변의 풍광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보니, 어느덧 기차는 구슬픈 기적소리를 울리며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신비한 폐허의 도시’로 알려진 아마르나 근교에 당도하고 있었다.

일단 말라위(Malawi)라는 중소도시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데이르 마와스(Deir Mawas)까지 가서, 선착장에서 허름한 페리를 타고 작은 강을 건너갔다. 강을 건너는 동안, 유난히 날카롭고 뛰어난 미의식(美意識)의 소유자였던 아멘호테프 4세의 선병질적인 초상이, 언뜻언뜻 흐르는 강 물살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했다.

결론부터 단정 지어서 말해본다면, 자신의 출생당시 이름이었던 ‘아멘호테프(아몬 신이 기뻐하다)’를 ‘아케나톤(Akhnaton, 아텐을 섬기는 자)’으로 개명하면서까지, 주위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단호하게 결행해 나갔던 아케나톤의 야심 찬 종교개혁은, 결국 그의 사후에 철저히 좌초되고 수도는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마르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꿈꾸며 아케나톤이 노래했던 ‘태양신에게 바치는 찬가’는 구약성서 시편(詩篇) 104장과 꾸준히 비교연구 되면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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