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강한]

곧 3월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4월이 되고 봄이 올 것이다. 그럼 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로, 그리고 본당 전례단원으로 지낸지 만 1년이 된다.

본당 단체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내가 속한 OO본당의 ‘전례단’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리 전례단은 주일 저녁 ‘청년 미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미사의 ‘독서’와 ‘해설’을 맡고 있다. 그밖에도 ‘성시간’, 그리고 사순 시기를 맞아 매주 금요일에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돕는다. 다른 본당들의 사정이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OO본당의 경우 수년 전에는 해설만 전담하는 단체, 독서만 하는 단체가 각각 있었다고 들었다. 두 단체의 기능이 합쳐져 지금의 전례단이 됐다.

지난 연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송년 행사 중에 나는, 주원준 본지 편집위원이 진행한 기자 토크쇼에 불려나와 “저는 본당에 ‘스파이’로 파견돼 있습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농담이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다가 스파이라는 단어에 놀란 OO본당 신자가 있다면 사과드린다.

ⓒ박홍기
영적 목마름으로 시작한 전례단 활동, 낯설디 낯선 '청년' 단원으로 살아남아

작년 3월, 이직을 앞둔 나는 한동안 마음이 떠나 있었던 ‘천주교 신앙생활’을 다시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고 싶은 내 나름의 정신적 ·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다. 천주교회 언저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본당에서 무엇이든 하면 직업 활동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는 속된 기대도 물론 있었다. 게다가 여자친구가 “너는 목소리가 좋으니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해보면 어떠냐” 하고 살짝 비행기 태운 것도 영향이 컸다. 범신론자를 자처하는 여자친구가 나에게 교회 활동을 하라고 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이유들로 나는 전례단원이 됐다. 일요일 오후 시간을 오롯이 바쳐야 하는 본당 청년단체 대신, 중년층 이상의 신자들로 구성된 일반(?) 전례단에 가입 신청을 했다. 혹시 연령 제한이 있을까봐 걱정했지만, 의외로 과분한 환영과 격려를 받았다. 전례단 인터넷 카페에는 ‘청년 신입 단원 입단!’이라는 제목의 게시물까지 올라왔다. “신자가 아닌 여자친구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일요일 오후 시간이 자유로운 단체에 들어오게 됐다”는 나의 인사말을 듣고, 내심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다는 단원도 있었다.

4월 초 아침 6시 미사, 떨리는 마음으로 제단에 올라 난생 처음으로 제1독서와 화답송을 했다. 그 후 약 10개월 동안 한 달에 약 네 번꼴로 새벽 미사,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은 토요일이나 주일 미사의 독서를 담당해 왔다.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떨리고 벅찬 체험이다. 전례단의 방침에 따라 미사 전에 열 번은 연습을 한다. 여러 차례 소리 내 읽다 보면 예전과 달리 눈에 확 들어오는 성경 구절도 있다. 그럼 별표를 그려 놓고, 때로는 블로그나 일기에 옮겨 적기도 했다. 더 전문적인 단원이 되려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는 시점이다.

작년 봄, 전례단 회식 자리에서 어느 고참 단원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전에도 결혼하지 않은 분이 전례단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오래 견디지 못했어요.”

30대 초반, 결혼하지 않은 내가 맘편히 지낼 곳은 어디?

40대 이상 중년의 나이에, 결혼한 신자들 중심인 전례단(부부 단원도 네 쌍이나 있다)에 30대 초반에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들어가 어울리고 봉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몸 둘 곳을 모르는 쑥스러움과 어색함을 이겨내야 했다. 그나마 전례단의 전체 모임이 한 달에 한 번뿐이고, 회식도 잦지 않다는 게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성가대처럼 매주 한 번씩 전체가 모여 연습해야 하는 단체였다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전례단 입장에서도, 다른 단원들의 막내 동생이나 조카뻘밖에 안 되는 나를 받아들이고 독서대에 올려보내는 것은,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자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다. 1년이 되면,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전례단을 위해, 그리고 ‘튀는 놈’으로서 살아남은 나를 위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소 특별한 조건에서 본당 활동을 하다 보니 ‘청년 신자들’과 청년이 아닌 ‘일반 신자들’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일반 신자’라는 이상한 말을 우선 쓰도록 하자.) 또한 왜 일반 신자들의 대다수는 ‘중년 이상의 결혼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을까 하는 물음도 떠오른다. 본당 사정이 이렇다 보니 30대 중반이 넘어서 이제 청년이라 부르기 어려운 ‘애매한 사람들’은 조용히 미사에 참례하는 것 말고는 어울릴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깊고도 넓은 본당월드, 이제 애매한 사람들을 위한 단체도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다.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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