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사순 제3주일) 루카 13,1-9

사람들은 재난을 당하거나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하늘이 준 것, 혹은 자기의 운명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신앙인이면, 그 불행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재난과 불행을 하느님이 인간 죄에 대해 내리는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준 벌이니 사람은 그것을 잘 참아 받아야 합니다.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인을 버리고 외면함으로써 의로운 하느님 편에 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재난과 불행으로 사람을 벌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 편에 선 의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웃이 겪는 재난과 불행을 퇴치하는, 선한 노력을 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그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학살하였다고 말합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총독은 백성의 소요를 항상 우려합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는 과잉반응은 식민지 갈릴래아를 지배하던 총독에게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언급하는 실로암탑은 예루살렘의 급수(給水) 시설에 있던 구조물입니다. 그것이 붕괴하였다는 사실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의 첨단 과학 기술로 건립한 대교와 대형 건물도 무너지고 내려앉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두 가지 재해(災害)는 모두 그 시대에 있을 법한 것들입니다. 여니 재해와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들입니다. 모든 불행은 죄에 대한 벌로 하느님이 주신다고 믿던 유대인들에게 그런 재해는 당연히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논리이지, 예수님의 논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실에 따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상이나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재난의 책임을 하느님에게 전가하지 말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이 재난이나 불행을 당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웃이 그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돌보아줍니다.

모든 불행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나는 하느님이 나를 버렸다고 믿어, 절망 가운데 죽어 갈 것입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내 이웃이면, 그와 같은 벌을 나는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그런 자세들은 모두 예수님의 눈에는 인간으로서 망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짓밟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높은 자도 강한 자도 아니고,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그 자녀인 신앙인도 그 자비를 실천하여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하느님이 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심고, 기다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호세아, 미카, 예레미야) 안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열매 맺도록 가꾸겠다는 포도원지기의 말을 받아들이는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기대하고 기다리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안에 나타나는 부정적 표현들, ‘잘라 버리라.’ 혹은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등의 말을 오늘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부정적 표현들은 기원 후 66년에 시작한 유대아의 전쟁이 70년에 이스라엘의 패전으로 끝나고,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인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무화과나무를 드디어 잘라버리셨다고 신앙인들이 믿으면서 발생시킨 말입니다.

하느님은 참고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삼년이나 기다렸다’, 혹은 ‘올해만 그냥 두시지오’라는 오늘 복음의 표현들은 심고 기다리는 하느님은 우리의 응답을 기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심고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열매 맺는 노력을 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자비로운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다양하게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심으셨고,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도록 기다리십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만이 보십니다. 우리의 좁고 짧은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잘라버릴 판단을 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 복음의 포도원 지기의 역할입니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함께 심어진 동료 인간이 이웃을 위해 할 일입니다. 그런 노력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역할입니다.

자기의 뜻을 완강하게 관철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못난 구석과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의 뜻을 강요하고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사람은 자기의 못난 구석과 약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웃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화하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며 그를 돕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하느님은 특정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배하라고 특권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의 뜻을 꺾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며 하느님을 배워야 하는 자녀들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심어놓고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생명, 자비로우신 당신의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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