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공의회, 잃어버린 30년-①]

▲ <교회직무론>, 스힐레벡스, 분도출판사, 1985
지난 2010년에 선종한 네덜란드 신학자 스힐레벡스는 지난 30년 동안 겪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의 좌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 인물이다. 스힐레벡스는 공의회 기간에 네덜란드 주교들의 충실한 신학적 조언자였지만, 교회직무에 대한 그의 저술들은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이후에 세 번이나 바티칸 법정에 서야 했다. 그가 보기에 요한바오로 2세는 바티칸에 불어왔던 ‘요한의 봄’을 뒤집고 ‘차가운 겨울’을 몰고 온 장본인이었다. 요한바오로의 겨울은 교황 재임 시 파트너였던 라칭거 신앙교리성 장관이 후임 교황이 되면서 지난 30년간 계속됐다.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땅에 묻은 뜨거운 노래는 죽지 않는다. ‘요한의 봄’에 뿌린 씨앗들은 사방에서 숨죽여 움을 틔우고, 나무들은 여전히 그 땅에서 수액을 길어 올리고 있다. 선교사들은 제3세계의 토착민들을 개종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권익옹호 활동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재편하고,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가난한 이들 속에 투신해 왔다. 한편 지역교회 차원에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여성신학 등이 폭넓게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낳은 이러한 활동들이 제약을 받게 되면서 활력이 크게 떨어지고, 다소 위축된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교회가 ‘새로운 감옥’이 되어간다는 극단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교회가 교황청을 둘러싼 소수 엘리트와 주교들에 의한 귀족정치로 회귀하고 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이를 두고 <민중의 외침>(분도출판사)으로 한국에 소개된 페니 러녹스는 <로마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요한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된 1978년 이래 이른바 복고라고 불리는 반개혁 움직임이 진행됐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과 돈을 가진 카이사르의 교회와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갈등이다.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 교황의 절대권력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노(117~138 재위)를 위해 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변증>(Apology for the Christian Faith)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과부를 돕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에게서 고아를 구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마치 친형제나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란 일상적인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 Second Vatican Council in session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돈과 권력의 유혹을 통해 교회를 타락시켰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분명히 어떤 구조가 필요했지만, 4세기에 로마인의 법적 체계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인의 체계는 평등과 사랑, 그리고 가난함을 기반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를 본질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혜택을 받은 것은  초대교회에는 없었던 성직계급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에 국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돈과 권력을 제공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부유한 교구의 주교직을 차지하려는 선거전이 폭력으로 치닫는 일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박한 갈릴래아 사람 예수가 전파했던 메시지는 사그라졌고, 로마제국 지배자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유지되었다.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에 속하는 속성들만을 하느님께 갖다 붙였다. 교황은 홍포를 걸치고 으리으리한 대관식을 거행하며 자신을 ‘성부’(聖父)라 부르게 하였다. 교황은 높은 계단 위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며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권위주의적 교회는 1869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함으로 극대화되었다. 교황은 모든 권한을 바티칸에 집중시켰고 주교 임명권을 가짐으로 지역교회에서 주교를 선출하던 전통을 뒤집어 놓았다. 절대권력은 교황을 절대군주로 만들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실험: “좀 더 많은 이들이 좀 더 많은 자유와 권한을”

가톨릭교회는 1958년 요한 23세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세속적 전통이나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복음서에서 보증하는 봉사직분으로서 교황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요한 23세는 바티칸의 확고부동한 세속적 이익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또한 교회와 세속권력 사이에서 교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맺었던 동맹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종교개혁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지적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성직자들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권위 있는 답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서, 교황직에서 정치성을 배제해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라고 요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권위주의 교회는 공감보다 훈계를 좋아했다. 종교적 실천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교리문답과 성인들과 유물들에 대한 숭배에 집중됐다. 가톨릭신자들은 이런 교회의 지배에 복종하거나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세상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자신을 ‘완전한 사회’라고 여기며 취했던 ‘거룩한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교회는 인간의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게 요한 23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현대세계와 협력하기를 요청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열면서, 그 자리가 신학적 토론장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표현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교리’보다 ‘사목’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착한 목자’가 되기 원했지 탁월한 신학자나 교리 해설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교황은 또한 주교들과 권한을 공유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개막연설에서 교황은 주교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지 말고 이 세상에 자비의 치료약을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교회의 권한을 교회의 구성원 모두와 나누어 갖기를 원했기 때문에, ‘교회는 (교계제도가 아닌) 하느님 백성’이라고 말했다.

▲ 요한 23세 교황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주교들은 더 많은 자유와 권한을 갖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교회의 일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라틴어는 토착어(모국어)로 대체되었고, 종교적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었다. 또한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둘 것을 강조하였고, 현대세계와 다른 종교들과 대화할 임무를 부여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노동헌장 80주년>을 통해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참상 때문에 “현상유지를 변호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해방신학을 가능케 했다. 이들은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와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를 통해 ‘제도화된 국가 폭력’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으며, 수만 개의 기초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로마의 지배와 성직계급의 힘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신설된 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를 통해 주교들이 교황과 결정권을 나누어 갖고, 각 나라의 주교회의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교황청의 역할은 축소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개혁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주교 선출권 및 다른 권한들을 지역교회에 돌려주기 위한 어떤 기구도 세우지 못했다.

요한바오로 2세, “공의회에서 후퇴하라!”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재임 동안 이러한 개혁에 반발하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세력들은 1978년 요한바오로 2세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지난 30년 동안 잃어버린 영향력을 대부분 되찾았다. 공의회 이후 바오로 6세 교황은 새로운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해 왔는데, 이를 계승하려던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급서하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이름만 차용한 채,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가장 상징적이며 실제적인 표현은 종교재판소의 후신인 바티칸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오푸스 데이 등 자기 뜻에 동조하는 세력을 부양했다.

▲ 사진 출처/유튜브 동영상 Renuncia Benedicto XVI / Profecías sobre El Papa Negro 갈무리
공의회 기간에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방침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던 요한바오로 2세뿐 아니라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은 “그동안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잘못 해석되어 왔다”고 단언했으며, 지역교회들은 충격을 받았다. 제일 먼저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교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라틴아메리카교회의 해방신학적 견해는 점진적으로 해체 당했다. 교황청은 여전히 주교 임명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개혁성향이 강한 교구를 분할하고, 보수적인 주교들을 새로 임명했다. 신학자들은 교수자격을 박탈당하고, 검열제도가 강화되었다.

요한바오로 2세는 바티칸은행의 미국인 이사인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시칠리아의 마피아와 연결된 이탈리아의 수완 좋은 사업가들과 몇 차례의 거래를 했는데도 그를 보호함으로써, 바티칸이 복음보다 체제 유지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과 동일한 입장을 취해 군사독재로 신음하던 라틴아메리카 민중에게서 신뢰를 상실했다. 이런 역전현상을 지켜보면서 미국교회의 토마스 제이 검블턴 주교는 “바티칸과 교황권을 ‘탈신화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때로 바티칸 역시 인간의 다른 도구들처럼 악을 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라너, 라칭거와 더불어 독일교회의 공의회 신학자였던 한스 큉은 요한바오로 2세의 교황 즉위 1년 만인 1979년 12월 18일에 바티칸으로부터 가르치는 교회법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가 교황의 무류성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자서전에서 “공의회가 아니라 공의회에 대한 배신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의회 이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현대사회의 세속주의 경향’에서 교회를 보호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의회 이전 교회야말로 세속주의에 침식되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권력을 지향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바티칸이 자본과 권력투쟁의 아수라장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권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교회를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견해가 자유롭게 공론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투명한 사회로 변화시키는 길뿐이다. 수도회에서는 ‘공동식별’을 강조하고, ‘다중지성’을 호소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권위적인 교회’와 ‘교황 유일체제’는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교회에서도 ‘지방자치’가 허용되어야 하며 지역교회 사제와 신자들이 자신들의 리더십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교황이 여전히 절대 권력인 가톨릭교회 안에서 새 교황을 기다리면서 마치 ‘정권교체’를 기다리는 국민 같은 심경에 사로잡히는 것은 슬프고도 아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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