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김검회 사무국장.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하던 날이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문의 전화와 미사 준비에 분주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염치없는 인터뷰를 강행했다.

올해 3월로 부산 정평위를 지킨지 꼬박 12년이 되는 김검회 사무국장. 긴 세월이 아니고라도 함께 일해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그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다. 흔한 관용적 표현으로 자그마한 체구, 소녀 같은 얼굴로 내뿜는 그만의 에너지를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김검회 사무국장. ©정현진 기자

그가 정평위에서 일하게 된 것은 오랜 작업(?)과 인연의 결과였다. 부산교구 정평위 전임 사무국장을 맡았던 선배는 “너를 후임으로 오랫동안 지켜봐왔다”고 고백했었고, 당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천사협) 활동을 하던 큰 언니와 형부는 보증수표가 됐다. “너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바른말 하던 아이”라는 가족들의 증언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마지막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은 깊숙이 끌어안고 있던 ‘사회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인연과 기회로 만난 정평위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본격적으로 사무국장을 맡은 것은 2001년 9월이지만 그해 3월에 처음 시작된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미사(아세미)’에 참여했다. 정평위에서 ‘주제 강연이 있는 미사’를 처음 시도하면서 전례와 성가 부분도 새롭게 갖추는 중에 당시 부산 중앙주교좌성당에서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던 김검회 사무국장은 맞춤 일꾼이었다. 그때부터 6개월 간 미사와 성가를 통해 만난 그는 자연스레 정평위 일꾼으로 자리를 잡았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조찬 모임, 지방 회의, 기자회견을 등을 치르고 오후 늦게 사무실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하는 생활 탓에, 집에서는 아예 내놓은 자식이 됐었단다. 그는 “누군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더 기쁘게 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깝다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절실한 것은 평신도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과 처우개선이에요. 대부분 1-2명의 인원으로 끌어가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서로 이끌어주거나 성장시켜줄 기회가 거의 없지요. 부산교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구가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직율도 높고요. 각 교구 차원이 어렵다면 전국 교회 차원에서라도 양성 시스템을 갖춰 주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부산교구 정평위는 7년 전부터 노동사목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등이 가톨릭회관 5층 ‘사목센터’에 통합 사무실을 꾸렸고, 올해부터는 이동화 신부가 사회사목센터장으로 취임, 다른 교구보다 안정적인 구도를 갖췄다.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내실을 다질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함께 정기회의, 피정, 연수는 물론 소풍도 다닌다며 김 사무국장은 환히 웃었다.

▲ 정평위 식구들과 제주 강정마을을 찾았을 때.(김검회 페이스북)

정의평화 운동, “복음적이고 친밀한 우리의 언어로 해야 한다”
교회 쇄신 활동...꼭 필요하지만, 여전히 한계로 남아

현재 정평위가 하고 있는 일들은 세 부분이다. 교육과 연대, 신심미사(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미사) 또는 현장 곳곳의 생명평화미사 등이다.

그는 특별히 교육 사업에 고민이 많다. 한정된 참가자를 넘어서려면 새로운 이들의 눈높이와 언어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제가 반복되면서 자연히 물러나게 되는 이전 참가자들과 새로운 참가자들 사이의 접합점을 찾는 것, 그리고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중도층을 끌어당기는 것이 현재 정평위의 과제다.

“언어가 중요해요. 이 지역이 보수적인 편이다보니 정평위에 대한 편견이 짙다는 한계도 있고, 무엇보다 과거와는 다른 분위기와 방법으로 운동하는 것이 필요해요. 특히 교회의 언어는 복음적이어야 하고 더 쉽고 친밀하게 다가가야 하죠. 성명서 하나를 쓰더라도 고유한 색깔을 지녀야 신자들에게 호소력이 있겠죠”

김 사무국장은 “첫 사회교리 학교는 다행히 신청자가 너무 많아 제한할 정도였다”며 “천차만별의 사람들을 어떻게 묶고 오해와 편견 없이 정평위의 방향과 사회 정의, 복음 정신을 알릴 것인가가 큰 과제”라고 털어놨다.

김검회 사무국장의 말대로 보수적인 부산경남 지역에서 정평위의 활동이 어떤 식으로든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 대외적인 활동이나 연대 외에 교회 안에서 정평위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김 사무국장은 “다른 사회 단체와의 연대는 자유스러운 반면,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면서, “교회 안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이뤄지고 있는지 묻는 교회쇄신의 과제가 참으로 난감한 것은 사실이다. 요즘에는 이 문제도 제기되고 있는데, 정평위가 함께 관심을 갖고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정의란 결국, 사람을 살리고 예우하는 일 아닌가?

인터뷰 중에 함께 활동하는 선배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고 말했다. 아프게도 “교회안에 희망이 없다”며 돌아서는 이들을 보면서도 그가 여전히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이유를 물었다.

“저 역시 몇 번의 위기를 겪었죠. 돌아보면 모두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였어요. 이를테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성찰의 문제죠. 공교롭게도 ‘정의’라는 가치에 투신하는 이들은 조금 날이 서있는 편이에요. 자기 과신도 많죠. 성찰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것 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 중심이에요. 그런 성향 때문에 두어 번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모두 이해하게 됐고, 그들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김검회 사무국장은 “상처받는 건 한 순간이지만 힘든 상황에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한다“면서,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복음과 사랑 때문이다. 좋은 가치는 많지만 궁극적인 것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는 것이 아닌가. 소위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자기모순에 빠질 기회가 훨씬 많다. ‘돌아보기’는 그래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저를 치유하는 것은 노래입니다”

온통 안팎의 일에 빠져있는 그가 성찰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은 노래를 할 때다. 사실 김검회 사무국장은 노래꾼이다. 지금도 정평위 미사를 찾은 사람들은 그를 사무국장이 아닌 초대된 가수인 줄 알기도 한다.

▲ 김검회 사무국장은 미사에서 늘 노래를 맡는다. 덕분에 사무국장보다는 노래하는 사람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정현진 기자
김검회 사무국장은 1993년 본당이던 부산교구 중앙주교좌성당에서 ‘아침’이라는 노래패를 창단했다. 지금은 몇 차례 수상까지 한, 어엿한 생활성가그룹이지만 당시는 모든 노래를 아울렀던 ‘소리패’였다고 한다.

민감한 몇몇 가사들을 바꾸기는 했지만, 성가는 물론 민중가요와 소위 건전가요까지 불렀다. ‘아침’이 중심이 된 미사를 따로 만들고 성가대회에서 상까지 타면서 부산을 넘어 전국의 명물로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미사 시간에 민중가요를 불러도 거부감을 갖지 않았어요. 나중엔 성가로 착각할 정도였죠. 굳이 민중가요를 불렀던 것은 제가 무슨 열혈 운동권이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우리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고통스럽고 가난한 우리의 삶을 그대로 노래를 통해 봉헌한다는 의미였죠. 현실 반영이 없는 찬양 일색의 예쁘기만 한 노래는 한계가 있다고 봐요. 우리 각자가 처한 구체적인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하느님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부분을 민중가요가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민중가요에 스민 삶의 모습들이 유독 그에게 울림을 준 것은 그 스스로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찾아와 예비자교리 삼수 끝에 세례를 받았다는 그는 자신의 입교 이유 역시 그 흔한 “마음의 평화”였지만, 그 마음의 한 켠에는 “가난한 이들의 애환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검회 사무국장은 “생활성가와 정평위 활동을 통해 성장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분께 모두 봉헌하겠다는 마음인 것 같다”고 고백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몸부림을 쳐도 그분의 계획이 어디에 미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지금 그가 고백하는 깨달음이다. 그저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함께 눈물 흘리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13년의 세월 속에서 건져낸 그의 몫이라고 했다.

“퇴보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가는 길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죠.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과 사람들에게 더 지혜롭게 다가가기를...몇몇의 운동이 아니라 더 확장되도록, 관심 없던 이들에게 한번이라도 더 말을 걸어 한 사람이라도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것이죠. 그것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정의평화위원회 일꾼, 아니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꼭 해야 하고 반드시 필요한 자리라는 마음으로 굳건히 지킬 것이라는 김검회 사무국장은 “다만, 일꾼 양성을 통해 기꺼이 이 길에 동참하는 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큰 소망이자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평위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깨어있음을 알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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