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백동흠]

택시 정기 점검 서비스가 예약돼 있는 날이다. 이른 새벽부터 운행한 뒤 11시쯤에 차량을 정비 업소에 맡겼다. 오후 3시에 찾으러 오란다. 한낮 일할 시간에 네 시간의 자유시간이 내게 덤으로 주어졌다.

택시에서 벗어나 손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완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바쁜 일상의 틀에서 우연히 바깥으로 나오니 얘기치 않은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 들고서 쇼핑몰 근처 벤치에 앉았다. 홀가분한 기분에 가벼운 일상 이야기책을 펴들고 샌드위치를 꺼내 들자 모든 게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초가을 바람결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투명하고 시원하다. 한낮의 햇살 세례가 따사롭게 쏟아진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웃는 표정에 정감이 넘쳐 난다. 벤치 옆 기둥에 뻗어나는 장미 가지를 묶어 주는 정원사의 손길도 가지런하다. 벽면을 타고 흘러나오는 인공폭포물이 신기한 모양인지 지나가던 세 살배기 꼬마가 멈춰 선다. 엄마 손을 뿌리치더니 앞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톡톡톡 물 벽을 두드린다.

 ⓒ박홍기
발렌타인 데이 날이어서 인지 거리 풍경도 핑크빛이다. 작은 선물을 마련해서 들고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느긋한 뒷모습도 푸근하다. 눈앞에 생생한 책장이 넘어가고 있는데 이럴 때 책은 무슨? 하며 슬며시 책을 덮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홀연히 흰 구두에 흰 옷을 입은 환한 얼굴의 거리 악사가 등장한다. 옆에 와 자리를 펴더니만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특이한 모양을 한 악기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힘차게 입으로 불어댄다. 어딘지 모르게 태곳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흡인력에 빨려든다.

옆 사람보고 무슨 악기냐고 물어보니 팬파이프란다.

오래지 않아 지나던 발길들이 하나 둘 멈추더니만 거리의 악사를 빙 둘러 에워싼다. 여기에 삐거덕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보태진다. 사냥꾼 모자를 쓴 한 할아버지가 쇼핑몰에서 트롤리를 끌고 등장한다. 트롤리를 붙들고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나오신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부드럽게 얼굴을 내미신다. 흥이 넘치신다. 사뿐사뿐 뒷발도 들었다 놨다, 무릎도 살짝 구부렸다 폈다 유연한 리듬 감각이다. 훤칠한 키에 흰옷을 입어서 흰나비처럼 가벼워 보인다. 덩달아 내 가슴도 덩실거리며 어깨춤이 나올 판이다.

길쭉한 버켙빵 한 개와 과일 한 봉지를 담은 단출한 트롤리가 할아버지에게는 지지대 보행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훌륭한 댄스 파트너로 변해있다. 몸이 불편해 덜커덩, 삐걱대는 소리도 할아버지 춤과 함께 멋진 음악 소리로 들린다.

그러자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팬파이프의 연주가 또한 더욱 그 깊이를 더하며 호소력 있는 음으로 가슴속 깊이 여울져온다. 자연의 찬가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원스레 밀려오는 파도 물결소리 실은 <Sailing>에 이어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영혼의 노래 <Hokimai>(Come Back to Home)가 연주 되면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춤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푸른 바다 위에 돛을 올린 채 바람을 등지고 요트가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순간 할아버지를 가볍게 껴안으며 뺨에 키스해준다. 그러더니 선물로 산 듯싶은 작은 꽃 한 송이를 자기 트롤리에서 꺼내 할아버지에게 주며 다시 한 번 다른 쪽 뺨에 키스한다. 엉겁결에 모르는 할머니로부터 키스세례를 받은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겸연쩍어하신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번지고 환호 소리가 높아간다. 파아란 가을 하늘 흰 구름 마냥 풋풋한 그림이다.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도 잊은 채 음악이 다 끝나도록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먹는 것 보다 듣는 것에 마음 빼앗겨 본지가 얼마만인가.

무심코 지나다 짬을 내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만난 아름다운 그늘이 시원하고 편안한 휴식처다. 달리다가 멈춰 서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데도 미소가 번진다.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우리 생활 주변 곳곳에 이렇게 오아시스처럼 신선한 샘물이 흐르고 있다. 어쩌다 규칙적인 일상에서 잠깐 떠나 보니 구경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택시운전만 했으면 그냥 속도에 밀려 지나쳤을 사사로운 풍경이다.

살아가다가 예기치 않게 쉼이 필요해 다른 곳에 그냥 서게 될 때 느끼는 새로움은 작은 일렁거림의 선물이다. 그러기에 가끔은 다람쥐 쳇바퀴에서 내려와도 보고 쉬었다가도 가는 시간이 제 몫을 하기도 한다. 때론 버스도 타고, 가끔씩 걸어도 보고, 꽉 짜인 계획 없는 텅 빈 시간도 가져보라는 이야기다.

어쩌다 우리의 틀에 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바깥을 보면 이런 정경들은 곳곳에 많이도 펼쳐지고 있는 듯싶다. 살아가면서 내 모습이 타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자연으로 남을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삶에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주는 아름다운 그늘이 되지 않을까.

한창 일할 시간에 쉬는 짬짬이 내게 다가온 은근하고 몽근한 사람 사는 냄새가 향기롭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팬파이프 생 연주음악 CD 한 장을 사 들고 나섰다. 정비를 마친 차의 시동 소리가 경쾌하다. CD에서 ‘아름다운 그늘’ 노래가 퍼져 나온다.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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