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과거로 돌아가려 했던 교황,
은폐했던 성추문 사건에 사람들은 떠나고

▲ 빌 그림 신부는 <가톨릭뉴스> 발행인이며, 도쿄에서 일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고자 가톨릭교회를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반복적이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노력들이 아니라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가 1415년에 교황직을 사퇴한 뒤 처음으로 교황직을 사퇴했다는 것으로 역사책에 그의 업적이 남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베네딕토 16세는 오는 2월 28일 저녁에 공식 사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어느 정도는 예견됐던 것이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 밑에서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일하던 당시 라칭거 추기경(지금의 교황)은 교황의 사퇴 가능성, 심지어는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2010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사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고, 최근의 여러 움직임으로 보아 그가 곧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실패한 과거로 돌아가려했던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품었던 큰 꿈 가운데 하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부하고 가톨릭교회에서 떠나간 비오 10세회를 다시금 가톨릭교회의 품으로 끌어안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비오 10세회 소속으로 주교 서품되어 자동파문 당했던 네 명의 파문을 철회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명이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인 것이 곧 드러나 국제적 논란이 되고 말았다.

요제프 라칭거가 독일인이고 과거 2차대전 당시에 히틀러 유겐트(청소년단) 단원이었으며 독일군에 징집됐던 사실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논란이 됐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뒤 전례 개혁에 의해 폐지됐던 미사 형식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을 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주교와 사제들이 이런 미사를 하는 이들과 협력하도록 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동시에 그는 전 세계 각지의 전례문 번역을 다시 라틴어 전례문 기준으로 엄격히 번역해서 단일화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는 영어사용권 성직자들 사이에 특히 평이 좋지 않았다.

비오 10세회 문제를 담당하도록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는 말하기를 베네딕토 교황이 비오 10세회와 화해하기 위해 “후진했다”고 한 바 있다. 그 결과는? 지난 몇 달 간 그의 (비오 10세회에 내 놓은) 여러 제안들은 계속해서 거절당했다. 비오 10세회라는 극단 전통주의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아무리 그가 애써도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좋았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꿈은 오히려 유럽 가톨릭교회가 다시금 실패의 옛날로 돌아가게 했을 수도 있다.

분노와 환멸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폴란드와 같은 전통적인 가톨릭의 강세 지역은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신자들이 대거 떨어져나갔다. 유럽 이외의 서구를 보면, 미국에서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톨릭이었던 사람”(former Catholic) 이라고 하는 것이 최대 종교적 정체성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황이 한 때 주교로 있었던 그 교구가 이제는 독일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이 떠나가는 곳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베네딕토 교황의 큰 꿈은 깨졌고, 이제 85살의 나이에 새로운 꿈을 찾기에는 너무 늦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여러 관측통들은 그가 자신이 추진하던 일들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슬퍼져서 사퇴할지도 모른다고 관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은 지난해 12월에 교황이 갑자기 예정에 없이 새 추기경들을 임명하면서 더욱 부풀어 올랐다. (보통 해마다 연초에 하는 새 추기경 임명을) 겨우 몇 달 더 기다리지 못하고 교황선거(콘클라베)에서 투표할 권한이 있는 추기경의 수를 최대 숫자까지 채우려고 애쓰는 듯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의 의료진이 선거인단의 수를 채우기 위해 기다릴 시간이 없는 무슨 사정을 그에게 말한 것일까? 그는 사퇴를 계획하고 있는가? 아니면 둘 다?

베네딕토 교황이 역사에 남긴 유산이 무엇이 될지를 명확히 알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제일 먼저, 요한바오로 2세 시절을 괴롭혔던 (성직자들의) 성추문 사건과 은폐 논란이 베네딕토 교황 시절에 더 확대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희생자들을 만나는 등 사목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훌륭히 대응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세계와 교회는 더 이상을 원했고 또 필요로 했다.

대중은 성폭력을 은폐했던 주교들이나 성폭력을 저지른 당사자들이 고의로 저지른 죄이든 태만으로 저지른 죄이든 간에 그들이 저지른 죄에 마땅한 처벌을 받은 것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분노와 환멸 끝에 교회에서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 시대에 그는 이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 (적어도 일부의) 가톨릭의 입장을 정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대화는 자신이 진짜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서로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 사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들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사상이 지닌 폭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경우가 잦았고 이 때문에 잠재적인 대화 상대자를 서로의 일치점과 불일치를 찾는 더 깊은 토론으로 이끄는 대신에 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베네딕토 교황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방식은 학술적 경향이 강했는데, 그래서 때때로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사목적 경험이 없어서 (그의 유일한 본당사목 경험은 1951년에 사제품을 받은 뒤의 반년 동안뿐이다.) 교황 회칙에 농담을 집어넣은 사상 최초의 교황이었음에도 대체로는 대중과 손쉽게 대화하는 법을 절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도 교황청으로의 권력 집중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의회 이후의 어떤 교황도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치하에서 권력 집중은 더 심화됐다.

그리고 마침내, “바티리크스”(Vatileaks) 사건이 터졌다. 온 세상 앞에 (권력집중에 따른) 무책임성의 불가피한 결과였던 교황청 안의 부패, 내분, 잡스런 것들이 다 알몸을 드러냈다. 출산과 성, 교회 안의 여성에 관해 그가 보여준 외관상의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사람들을 대화로 초대하기 보다는 갈수록 많은 사람을 소외시켰다.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은 비극적이다. 그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는 스타일을 복구시키려 했다. 그의 생각이 맞는지 여부는 각자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이 하려던 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마치기에 이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앞으로 100년 안에는 교황들이 죽기 전에 퇴임하는 것이 일반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교황직을 사퇴했다는 것은 오랫동안 다시는 없을 업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혁신의 업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사 원문: For Pope Benedict, dreams did not come true 번역/가톨릭뉴스

<기사제휴/ UCAN 가톨릭뉴스(http://korea.uc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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