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선교일기]

남미에서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성대하게 지낸다는 유명한 카니발 축제의 끝무렵이기도 했고, 또한 온 나라가 이 독특한 코아 연기에 물들기도 했었던 지난 한 주일이 지나갔다. 안데스산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큰 남미 원주민으로 남아있는 케추아족(族)이 사용하는 언어인 케추아어(語)로 코아(K’oa)는 그들이 지내는 전통 의식의 이름이다.

▲ 안데스인들이 노래와 춤을 통해 코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윤주
볼리비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 문화와 토착 믿음에 대해 가지는 깊은 애정과 지극한 투신은 가히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종교적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나 대단히 현대화된 문명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전통 문화와 관습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해 그들의 일상에서까지 그 전통이 그대로 묻어난다. 하나의 좋은 예가 어머니이신 대자연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파차마마(Pachamama)라는 말과 그에 따라오는 재미있는 행동들일 것이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파차마마에게’라고 말하며 먼저 땅바닥에 흘리듯이 술을 조금 뿌린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이신 대지에 존경을 표하는 방법이다. 내가 마시기 전에 대자연인 파차마마에게 먼저 술을 드리고 나서 이웃과 친구들과 술을 나누는 것이다.

코아(K’oa)는 안데스인들이 한 달 동안의 풍요롭고 조화로운 삶을 기원하며 매달 첫 금요일에 지내는 전통의식이다. 그러나 카니발의 의미와 풍성한 추수를 기다리는 때가 맞물리는 이 시기에는 특별히 모든 볼리비아인들이 한 해 동안의 축복을 바라며 일 년 중 가장 정성스럽고 성대하게 이 의식을 지낸다.

이 의식은 지역마다, 가족마다, 생활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치러질 수 있다. 산꼭대기에서 지낼 수도 있고 학교 강당에서 지낼 수도 있다. 자기 집 앞마당이나 동네 입구, 일하는 사무실에서도 지낼 수 있다. 물론 고산지대에 사는 원주민들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주어진 환경에 맞게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지낼 것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불을 피우고 기도하는 예절과 서로 음식을 나누는 기본적인 틀은 어디서나 같다.

의식은 몇몇 사람들이 전통악기인 북과 피리를 연주하며 입장하며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들어와 하나의 원으로 둘러서고 원의 가운데에는 불을 피울 준비가 되어있다. 의식의 규모에 따라 큰 화로를 준비하기도 하고 소박한 질그릇을 쓰기도 한다. 그 안에는 불을 붙이기 위한 작은 석탄조각이 들어있다.

▲ 의식의 시작 ⓒ이윤주

▲ 의식에 쓰일 봉헌 준비 ⓒ이윤주
첫 번째 순서는 ‘상을 차리는’ 의미로 봉헌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약초, 향 등 축복을 구하는 상징적인 작은 물건들을 준비해 화로 안에 봉헌한다. 봉헌물중에 재미있는 것은 각설탕인데 이 의식에 사용되는 각설탕은 납작하고 큼직하며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있다.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이들이 새겨진 각설탕을, 집을 원하는 사람은 집 그림이, 사랑을 기원하는 사람은 사랑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진 각설탕을 준비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코카(Coca) 잎이다.(볼리비아에서 코카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은 다음번에 꼭 소개할 예정이다.) 코카잎이 가득 든 바구니에서 각자 돌아가며 한 주먹씩 잎을 집어 들어 손바닥에 펴놓고는 그 중에서 가장 반듯하고 흠이 없는 잎을 몇 장 골라 가운데 놓인 화로 안에 봉헌한다. 흠 없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구약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각자가 정성껏 봉헌한 물건들로 화로가 채워지면 알콜을 약간 붓고 불을 붙인다.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오르면 이 의식의 제사장(공동체나 가족의 일원)은 파차마마에게 바치는 기도를 시작한다. 감사와 존경의 기도로 시작해, 평화와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정성껏 기도를 드린다.이어서 제사장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로를 들고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차례로 돌며 연기를 입으로 불어 퍼지게 한다. 연기가 퍼지며 공간이 정화되는 순간이다. 지역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 모두에게 연기를 하나하나 불어주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경우도 있다. 미사 중에 분향을 하는 의미와도 어울린다.

이제 파차마마에게 술을 올릴 차례이다. 제사장은 술을 조금 떠 또다시 동서남북 네 방향을 돌며 조금씩 땅에 흩뿌린다. 대자연을 상징하는 어머니이신 이 땅에 존경을 표하고, 우리가 사는 온 우주의 창조계가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축복을 청하는 이 기도는 너무나 신성하여 신비로운 기운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나서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술을 떠, 같은 방법으로 땅에 흘려 파차마마에게 존경을 표하고 서로 나누어 마시기 시작한다.

▲ 음식을 나누는 여인들(왼쪽)과 제사장의 기도(오른쪽) ⓒ이윤주
그렇게 연기가 퍼지고 퍼져 불씨가 사그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한 식탁에 모여 준비한 음식과 덕담을 나누며 춤과 노래로 기쁨을 드러내고 이 신성한 의식을 마무리한다. “이 식탁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말씀이 여기서도 살아 숨쉰다.

나는 운 좋게도, 아직까지 문명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고산지대 원주민들이 지내는 이 의식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고, 수백 년째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의 의식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신성한 경험을 통해 나는 우주만물에 대한 지극한 애정뿐 아니라, 그 우주와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믿음이 몇 천 년 후에 그 땅에 들어온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얼마나 멋들어지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보았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니 이런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같은 예절을 지내며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없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제사장이 아닌, 평범한 시골 노인이 이끄는 이 신성한 기도 의식을 금지할 규정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한 마음으로 어울려, 한 분이신 그분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아,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 동네의 한 젊은이가 내게 들려준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기억난다. 믿음이 깊은 천주교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그가 혼란스러워 했던 것은, 날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감리교, 몰몬교, 오순절 등의 여러 개신교회 전도자들을 더없이 따뜻하게 맞아 그들의 믿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들이 내어놓는 모든 종교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볼리비아 원주민으로서 토착문화와 믿음에 대한 뿌리를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께 그는, “모든 종교를 다 가질 수는 없으니 하나만 고르시라”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하곤 했었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에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은 만나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했던 어머니의 태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들 모두가 같은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 조금씩은 서로 다른 방법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모두가 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코아(K’oa)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조화로운 공존이다. 서로의 다름을 보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나는 이러한 멋진 경험들을 통해 배운다. 앞으로 어떤 더 많은 멋진 배움의 경험들을 통해 내가 조화로운 인간으로 재창조될까. 흥.분.된.다.

이윤주 수녀 (메리놀 수녀회, 볼리비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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