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정지’ 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실행’하라

▲ 프리실라 카타콤바의 착한 목자(좌)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화(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지하묘지 카타콤바 벽에 그려진 예수는 턱수염이 없는 젊은 양치기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 분에게 친밀감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였던 4세기에 이르면 초상화 속 예수는 턱수염을 기르고 준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초상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복종을 요구하는 엄격한 황제의 모습을 닮았다.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는 세속적인 권력과 부를 거부한 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거듭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군주의 모습으로 덧칠 되면서 ,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불리던 교황의 모습 역시 황제의 모습과 겹쳐서 나타났다. 덧붙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궁정 주교였던 에우세비우스는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로고스, 하나의 황제, 하나의 제국”을 표방하며 “하느님이 한분이듯이, 하나의 제국 안에서 황제 역시 하나”라고 전했다, 이 문법이 그대로 교회 안에 유입되어 결국 하느님이 한분이듯이, 제국 안에서 교황 역시 하나인 신권(神權)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교황직은 언제나 통치권으로 해석되었고, 마찬가지로 주교직 역시 교구 안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이후 교회 안의 직무는 권력의 자리가 되었고 1962년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와서야 비로소 “교회직무는 권력이 아니라 봉사”임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을 거부한 요한바오로 2세
사회적 진보와 종교적 보수가 동거한 가톨릭교회의 지난 30년

요한 23세 교황이 시작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이 계승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권력구조이기 전에 ‘하느님 백성’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교회전통 안에서는 생소한 ‘교회의 민주화’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교회의 수직적 차원보다 수평적 차원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단두대 위에 오른 것처럼 위태로워진 것은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 많은 덕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중심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염려 때문에 교회 안에 퍼지기 시작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단속했다. 교황의 숱한 해외순방과정에서 평신도 대중은 교황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교황은 그들의 복음을 이해하는 신앙감각을 ‘사실상’ 믿지 않았다.

1980년 1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자유주의적이었던 네덜란드 주교들의 시노드를 로마에서 열기로 결정한 것은 상징적이다. 시노드가 열린 장소는 예전에 교황청이 목 잘린 상들을 놓아 둔 적이 있었던 ‘목 잘린 두상(頭像)들의 방’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교회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을 완화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평신도, 특히 여성들이 성찬례 준비를 도왔고, 교리반과 성서반에서 가르쳤다. 공의회 이전에는 수녀들조차 성찬례를 준비하기 위해 제대에 오를 수 없었다.

▲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바오로 1세 교황과 요한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교황
네덜란드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미사 중에 성서봉독을 했으며, 성체분배를 도왔다. 사제와 수녀들은 주교에게 권고를 할 수 있는 민주적 협의회를 조직했고, 주교는 공동으로 작성한 사목 계획을 따랐다. 또한 미국의 핵미사일 유럽배치를 반대하고, 제3세계의 독재자들을 반대하는 등 정의평화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유럽에서 가장 세속화된 네덜란드에서 시민들에게 대단히 환영받았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무질서한 교회로 보였다.

교황청의 치밀한 계획아래 이루어진 이 시노드에서 네덜란드 주교들은 결국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에서 엄숙하게 46개 조항에 서명했다. 이 서명으로 평신도에 대한 사제의 전통적 권위가 다시 선포되고, 평신도는 성별을 막론하고 성찬례을 준비하거나 교리와 성서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사제들은 주교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강요받고, 사제들의 협의회는 해체 당했다.

1984년 교황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한 라칭거 추기경(훗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를 로마로 소환한 이유도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에서 민중 가운데 탄생하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교회 민주화가 가톨릭의 천상적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이어지는 가톨릭교회는 정의평화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요한 23세 교황이 가까스로 열어놓은 교회의 창문을 도로 닫고 교회쇄신 노력에 빗장을 걸었다. 그 후 ‘사회적 진보’와 ‘종교적 보수’라는 어색한 동거의 시대가 지난 30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한국교회 역시 그 영향이 커서, 제 아무리 진보적인 사제라 해도 사회문제에는 과감한 발언을 불사하지만 교회의 권위주의와 비리에 대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 자기분열증을 앓고 있다.

최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오는 2월 28일 교황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이 갑작스런 발표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지난 30년 동안 득세하며 로마와 지역교회의 요직을 잠식해 들어가고, 설립자인 에스크리바를 성인품에 올린 쾌거를 거두었던 오푸스데이와 같은 교회 내 보수집단은 차기 교황을 뽑아야 할 추기경들이 대부분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임명한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에 안심하겠지만, 성령의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중대한 시간에 다시 떠올리는 것은 바오로 6세 교황이 자신의 영대를 걸어주었던 사람이다. 교황좌에 오른 지 33일 만에 안타깝게 선종함으로써 요한바오로 2세의 시대를 열어주었던 요한바오로 1세 교황(재위: 1978년 8월 26일 - 1978년 9월 28일)이다.

겸손한 하느님의 종복, 요한바오로 1세
교황,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속’ 선언

▲ Albino Luciani, 요한바오로 1세 교황
베네치아 교구장이었던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추기경. 그는 1978년 콘클라베의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루치아니 추기경은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요한바오로’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미소 교황’(Il Papa del Sorriso)으로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밝혔다. 8월 27일에 행한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라는 제목의 첫 라디오 메시지에서 “본인의 프로그램은 요한 23세의 크신 마음으로 다져진 노선에 따라서 바오로 6세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계속하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유산을 수행하는 일을 계속할 셈입니다. 공의회의 슬기로운 규범들은 마땅히 준수되어야 하며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노력이 관대하게 일고 있지만 아직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쇄신의 추진력을 무산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1세 연설집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 성바오로출판사, 1979년)

이어 교황은 <교회헌장> 9항을 빌어 “유혹과 고통 사이를 걷고 있는 교회는 주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완전한 충성을 잃지 않고 주님의 어엿한 신부(新婦)로 머물러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함으로써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꺼질 줄 모르는 빛에 도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특히 바오로 6세 교황을 “예언자다운 행동양식과 잊을 수 없는 교황직 수행으로 위대하고 겸허한 인간의 놀라운 위치를 간직했다”고 평가했으며, 자신은 요한 23세 교황처럼 교회일치를 위한 일이라면 ‘교리를 이완시키는 일 없이, 그러나 주저치 않고’ 즉각적인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라고 밝혔다.

벽돌공의 아들 루치아니 주교.. 사목표어는 ‘겸손’
요한바오로 1세 교황, 권위적인 삼층관 버리고 봉건적인 교황 이미지 바꾸다

알비노 루치아니(요한바오로 1세 교황)는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벨루노에 있는 포르노디카날레(지금의 카날레다고르도)에서 태어났는데, 벽돌공 조반니 루치아니의 아들이었다. 그처럼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었던 요한 23세 교황이 벨루노의 신학교수였던 그를 주교로 승품했는데, 그가 선택한 사목표어는 ‘겸손’(Humilitas)이었다. 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1969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루치아니를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지명했으며, 1973년에는 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John Paul I on Love 갈무리
1978년 8월 26일, 루치아니 추기경은 65세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대관식에 앞서 몇 가지 중요한 인간적인 결정을 내렸다.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자신의 연설을 담은 공식 문서를 통해, 교황 스스로 ‘짐(朕)’이라고 부르던 관례를 깨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봉건시대의 유물인 권위적인 호칭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교황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의 사용을 거절했지만, 신자들이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관료들의 권유로 가마를 타고 행진 후에 걸어서 교황좌로 올라갔다.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6시간 동안 화려하고 장엄하게 베풀어지는 교황 대관식마저 거부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대관식을 간단한 양식의 ‘교황 즉위 미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황 대관식 때 머리에 쓰던 삼층관(Papal Tiara, 교황관)도 “‘종들의 종’이 머리에 쓰기에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삼층관은 동로마제국 황제들이 머리에 쓰던 비잔틴식 황제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황의 세속적, 교회적, 천상적 세 권한을 상징한다. 이는 교황의 통치권, 신품권, 교도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황 대관식에서는 교황에게 삼층관을 씌우며 이렇게 말했다. “세 개의 관으로 장식된 이 교황관을 쓰는 당신은 군주들과 왕들의 아버지이고, 세상의 안내자이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아시오.” 이 삼층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교황은 바오로 6세 교황이며, 그는 대관식 뒤 자신의 삼층관을 빈민과 집 없는 이를 위해 베푼 자선사업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미국인들에게 기증했다.(<바티칸 영혼의 수도, 매혹의 나라>, 마이클 콜린스, 디자인하우스, 2009년 참조)

다정한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인 나도 조금은 신심이 있습니다”

▲ 요한바오로 1세는 교황이 된지 33일만에 선종했다. 장례식을 위해 운구를 모시고 있다. (사진출처/듀브 동영상 The last days of Johannes Paulus I 갈무리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면서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교회법처럼 엄격한 아버지(군주)의 모습보다는 백성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착한 목자’가 되기로 작심했던 요한 23세의 성정을 닮았기 때문이다.

1979년에 출간된 교황의 연설집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에는 착좌 후 선종하기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쓴 19편의 연설문이 실려 있는데, 그동안 교황들이 사용해 오던 외교문서 같은 투의 글은 없다. 예화를 들어가며 다정하게 무르팍 앞에 놓인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을 건넨다. 9월 3일 발표한 삼종기도 담화는 “강도도 제 나름대로 신심이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교황인 나도 조금은 신심이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운을 떼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남긴 <사목규범>을 인용하며 말을 이어간다.

“나는 여태까지 착한 목자란 이런 사람이라고 묘사했지만 나 자신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람이 도달해야 할 완덕의 피안을 보여주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도 결점과 과오의 파도에 까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가 빠져 죽지 않게 기도로 구원의 판자조각을 제게 던져 주십시오.”

한편 자신은 베드로의 교황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9월 20일 일반알현 때에는 “교회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이 나왔을 때 저는 감동했고 열성이 솟구쳤습니다. 자유, 정의, 평화, 발전 등의 중대문제의 해결을 촉진하고 대안을 제기하는 데는 교회 교도권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다고 봅니다.”

예순 다섯 살의 젊은 교황이 죽다
요한바오로 1세의 죽음으로 ‘일시정지’ 된 교회쇄신

▲ 기도하고 있는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9월 3일 삼종기도 담화에서 어느 스페인 작가의 말을 빌어 "세계가 잘못되어 가는 까닭은 기도보다 전쟁을 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The last days of Johannes Paulus I (Albino Luciani 1978) 갈무리
이런 교황이 33일 만에 9월 28일 밤, 어느 청년의 살인사건을 들으시고 어두운 세태를 탄식하며 침소에 들어다가 서둘러 이승을 빠져 나가셨다. 당시 바티칸 당국은 예순다섯 살의 교황이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 발작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의자에 앉은 채 선종한 교황의 콧등에는 안경을 얹혀 있었고, 손에는 <준주성범>이 들려 있었다고 전한다. 교황의 죽음에 대한 억측이 난무하며, 당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교황이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던 바티칸은행에 대한 내사를 지시한 가운데 교황청 내 마피아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추정보도를 하였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교황이 죽었을 때 그가 베네치아에서 타고 온 란챠 2000은 꼬리표가 붙은 채 차고에서 수리 중이었으며, 성 마르코의 사자가 새겨진 교황문장은 여태 제작 중이었다. ‘어부의 반지’와 옥쇄도 주문만 했을 뿐 도착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교황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주교였지만,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보수적인 교황청 관료들은 요한 23세 교황이 되돌아온 것처럼 경악했다고 전한다. <슈피겔>은 그의 죽음을 두고 어느 교황청 고위성직자가 “성령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면서 <개막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회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더 충실해지도록 우리 자신을 쇄신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교회는 지배가 아니라 봉사를 위해 태어났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급사함으로써,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려던 행진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주춤거렸던 발걸음은 긴 역사에서 볼 때 ‘일시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으면서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교황이 말한 신앙의 해는 ‘신앙쇄신’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세계교회는 믿음의 내용인 ‘신조’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교리서>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특별히 최근 사회교리 주간을 선포하며 ‘사회교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는 <사목헌장> 1항의 내용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추는’ 상황이지만, 교회 내부의 사정은 성직자들의 아동성추행 문제와 바티칸은행의 비리와 교황청 내부의 권력 투쟁 등으로 ‘결정적이며 근본적인’ 쇄신을 요청받고 있다. 이때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관례를 깨고 중도 사임을 발표한 것은 성령께서 이끄신 것이다. 성령께서 ‘일시중지’ 되었던 교회쇄신의 과업을 다시 ‘실행’하라고 이르시는 표지다. 새로 선출될 교황의 출신이 아프리카인지, 라틴 아메리카인지, 이탈리아인지 성령은 따지지 않으실 것이다. 다만 성령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다시 실행되기를 바랄 것이다. 성령이여, 당신의 교회를 새로운 곳으로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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