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천주교성폭력상담소&쉼터 평화의샘 윤순녀 대표

▲ 윤순녀 평화의샘 대표 ⓒ강한 기자

‘평화의샘 공동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윤순녀 수산나 씨.

그는 20대였던 1960년대 중반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시작으로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새세상을여는천주교여성공동체의 회장, 대표직을 두루 거쳐, 1998년부터는 평화의샘이라는 이름 아래 성폭력 상담과 성매매 피해 청소년 지원에 힘을 쏟아 왔다.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으로도 잘 알려진 그를 서울 전진상센터에서 만났다.

현재 ‘평화의샘’이라는 큰 틀 아래에는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성매매 피해 청소년 지원 시설인 평화의샘, 청소년 교육센터, 심리상담센터 등 네 가지 단체가 있다. 1998년 고(故) 박은종 신부의 도움으로 서울 삼각지성당의 작은 공간일 빌려 천주교성폭력상담실(당시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부설기관)을 열었고, 점차 그 영역이 쉼터로, 교육으로 넓어져 온 것이다.

태아 생명도 소중하지만
아기가 살아갈 세상 걱정도 해야

지난 15년간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성폭력상담소와 성매매 피해자 시설을 이끌어온 윤순녀 대표다. 무엇보다도 윤 대표는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낙태 허용 조항을 폐지하자며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생명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저도 기본적인 관점은 ‘생명 수호’지요. 어떻게 생명을 막 죽이라고 합니까? 누군가 성폭력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더라도, 생명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아기를 낳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낳을 방법을 찾아줘야죠. 그런 일을 하는 교회기관에 연결도 많이 해줬습니다.”

그러나 윤 대표는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무조건 낙태를 반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미혼모나 장애여성의 자녀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이 완전해지기 전까지, ‘구조악’을 해결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낙태 반대만 내세우는 것은 “무책임한 얘기”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뱃속 아기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아기가 배 밖에 나왔을 때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는가” 물으며 “교회가 낙태를 반대하려면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상담소를 운영하다 보니 낙태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지경의 상황을 많이 겪는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평화의샘에 머무는 장애여성청소년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다 보니 자립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장애가 심각한 여성에 관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전진상 … 온전히 봉헌하고, 진실하게 사랑하며, 기쁘게 살기

윤순녀 대표는 20대 후반이던 1973년 국제가톨릭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le, 약칭 AFI) 회원이 됐다. 1960년대 말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장으로 일할 때, 국제 문서를 담당해주었던 독일 출신의 AFI 회원의 영향이 컸다. 한국 사람의 문화를 존중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그 독일인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평신도로서 자유로우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세상에 헌신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AFI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레브 벵상 신부의 선교정신의 영향으로 이본 퐁슬레가 1937년 벨기에에서 세운 미혼 여성 단체였다. AFI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이 곧잘 떠올릴 ‘전진상(全眞常)’이라는 말은 복음서의 정신을 요약한 레브 신부의 가르침이다. 윤순녀 대표는 ‘전진상’은 “우리 생활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고(전희생),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며(진애인), 항상 기쁘게 생활하자(상희락)”는 정신이라고 소개했다. AFI 회원은 이 전진상 정신을 생활지침으로 따르는 사람들이다.

AFI는 1956년 한국에 들어왔는데 유럽 출신 AFI 여성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수도자로 생각해 “수녀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AFI는 분명히 ‘평신도 단체’다.

오늘날 서울 명동에 상담소, 기숙사 등의 역할을 하는 전진상교육관이 있고, 합정동에는 60세 이상의 회원들이 모여 사는 전진상센터, 시흥에 전진상의료복지센터를 두고 있다. 현재 한국의 AFI 회원은 40여 명인데, 이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고, 반드시 AFI 시설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다. AFI 회원은 자기 직업을 갖고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며, 사회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자 한다.

AFI는 ‘독신 여성’만의 단체가 아니에요

제복을 입는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 신분으로 ‘전진상 정신’을 따르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윤순녀 대표도 “우리 단체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기에는 매우 넓으면서도 모호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분명히 AFI는 교황청에 뿌리를 둔 단체지만, 가톨릭 신자만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외국에는 콥트교회나 개신교 신자면서도 회원이 된 사례가 있다.

AFI 회원이라면 곧 ‘독신 여성’이었던 공식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맞았다. 윤순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전세계 AFI 회원 중 결혼한 사람이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여성이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결혼한 여성들이 회원이 됐고, 이와 함께 그들의 남편을 비롯한 남자 회원도 받아들이게 됐다. 한국에도 수련 중인 부부 2쌍을 포함한 3쌍의 부부 회원이 있다.

고령화 추세와 함께 교회도 늙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AFI도 새로운 회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고민이다. 윤순녀 대표는 “AFI가 시작된 벨기에의 회원 평균 연령이 80세”라며 “유럽에는 새로운 회원이 거의 없고, 아프리카나 중동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라고 전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가장 회원 수가 많은데, 윤 대표가 입회한 1970년대에 매년 5~6명의 새 회원이 들어오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1년에 1명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독신 여성’이 아닌 회원도 받아들인 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것이 윤 대표의 평가다.

“지금 유럽의 AFI 1세대는 80~90대에 이른 노인들이에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결혼한 남자 회원까지 들어와 일하니까 국제행사에서 보면 의자도 번쩍번쩍 들어 나릅니다. 가족도 자식이 없으면 대가 끊어지는데, 단체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설립자 이본 퐁슬레가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했어요. ‘단체가 너무 흔들리는 것 아니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우리가 독신만을 고집할 게 아니었던 것이죠.”

공의회 50년, 전례는 바뀌었으나 의식은 제자리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으니 윤순녀 대표는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 윤 대표는 “이 성경 말씀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와 세계의 문제를 성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런 맥락에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한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도 윤 대표는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다음 해였던 1963년에 세례 받은 윤 대표는 “공의회 이후 전례와 평신도의 지위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신자들의 의식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아쉬워했다.

“한국 교회도 50년 사이에 크게 성장했죠. 신자 수가 500만이 넘고, 한때 2~3%밖에 안 되던 신자 비율은 1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까요?”

지적 장애 청소년들과 시 쓰는 모임 열며
피어나는 아이들 인성에 감격해

끝으로 윤순녀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는 쉼터 ‘평화의샘’에서 지내는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 함께 하는 독서 모임이다. 주로 지적장애를 안고 있는 청소년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무엇이든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고, 어떤 점이 좋았고,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짧게 적어 오게 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에는 시집을 읽었는데, 그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자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시를 써오는 것을 보며 너무너무 기뻤어요. 가족, 특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번 달에도 세 아이가 시를 썼는데 아이가 시를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저렇게 자기 속의 것이 나오는구나. 너무 잘 썼다고 말하고 안아줬어요. 이렇게 아이들 하나하나의 인성이 피어나는 순간을 접할 때,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구조악 같은 것은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이 순간에 이 아이와 내가 이렇게 만나고 있으니까요.”

* 평화의샘 
전화  02-825-1272 (상담 가능 시간 월~금요일 오전 10시~ 오후 6시),
홈페이지  http://www.peacewel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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