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묵상] 루카복음 4,1-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루카복음 4,1-13)

[빠더 푸코의 묵상]

▲ 악마의 유혹 (Simon Bening作, 16세기)
지난 재의 수요일로써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순 제1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40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합니다. 사순을 의미하는 40이라는 숫자는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모세의 지도하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함께 한 40년의 광야생활(신명 8,2), 시나이 산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하느님과 함께 한 모세(탈출 34,28), 이제벨 왕후의 보복을 피해 40일의 여정으로 하느님의 산 호렙을 향했던 엘리야(1열왕 19,8)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성령에 이끌려”(4,1) 40일 동안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자마자, 광야로 나가시어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을까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셨을까요?

물욕과 권세욕 앞세운 광야의 유혹
그러나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우선 악마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대답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신명기(8,3)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현세의 삶을 유지하거나 그 삶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있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더 나아가 “이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해진 적이 없고, 너희 발이 부르튼 적이 없다”(8,4)고 이르면서 현세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에 대한 예수의 답변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역시 신명기(6,13)를 인용해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악마가 예수께 보여준 “세계의 모든 나라”(4,5)와 예수께서 전 생애를 걸고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같은 ‘나라’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 유혹은 결국 위기에 처한 한 인간이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어떤 통치의 이상(理想)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지를 답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시편 91,11)을 들어 예수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신명기(6,16)를 인용한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예수의 대답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악마가 예수를 데리고 간 “예루살렘”(4,9)은 예수가 걸어갈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암시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고 죽고 묻혔으며, 결국 부활한 장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평생토록 보여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최종 결과를 드러낼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한 유혹은 제자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예수를 유혹하는데 실패한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4,13) 물러갔다가 결국 예수를 팔아넘길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루카 22,3). 이는 이러한 유혹이 현재 우리 교회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유혹에 하느님의 자리 내어준 오늘날의 신앙인들

▲ 유혹받는 예수 (James Tissot)
광야에서 유혹은 점차적으로 인간 심리를 이용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광야”(4,1) 그리고 “높은 곳”(4,5) 마지막으로 “성전 꼭대기”(4,9)에서의 유혹은 높은 자리를 즐기는 인간의 명예욕을 이용한 것입니다. 유혹의 재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배고프고 지친 예수에게 딱 맞는 단순한 먹을거리인 “빵”(4,3) 그러다 인간이 그토록 갖기를 소망하는 “권세와 영광”(4.6) 마지막으로 “하느님”(4.9)마저 그 재료로 삼습니다.

이 세 가지의 유혹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며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 몸소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이유를 드러냅니다. 바로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마저도 내 입맛에 맞아야 하고, 내 기도를 잘 들어주셔야 하느님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깨끗이 치워버리거나, 내 뜻에 맞는 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모셔둡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신앙인이라 칭합니다.

우리 자신은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자신하지만, 그것은 그 만큼 약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명예와 권세 그리고 더 많은 아집과 교만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약하디 약한 우리입니다.

강함과 약함의 질서를 뒤바꾼 예수의 삶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자 비우고 또 비우는 시기, 사순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강함과 약함의 질서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강함을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약함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약함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강함이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음에도 그것마저 비우기 위해 길을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그 분을 삶의 중심에 두고자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 또한 ‘허무’ ‘무의미’ 등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시기입니다. 사순 첫째 주일에 우리가 이 복음을 읽은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마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그러하듯, 부활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와 말씀 중에 하느님과 가깝게 지내는 시기가 바로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며 내가 있어야 할 제 자리를,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기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시기가 무척 ‘고맙’습니다. ‘고맙게도’ 사순시기가 하느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축제’처럼 다가왔습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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